교수님 앞에서도 흡연이 가능했던....

[김윤수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대학생이 되고 보니 온갖 금기가 일시에 해제되어 자유화 세상이 었다. 그러나 자유화에 따른 고비용이 새로운 문제였다. 당시 교복과 교모가 지정되어 있었지만 이는 ‘입학 절차상 비용’에 지나지 않았고, 재래시장에서 염색한 군복과 낡은 워커 화를 사서 신고 다니는 것이 통례였다.

반면에 두발 자유화로 머리를 길러 하이칼라에 포마드를 발라 향수 냄새를 풍길 수도 있었고, 교수님 앞에서도 흡연이 허용되다시피 자유 방임이었으니 모두가 비용이었다. 또 학교 앞에 즐비한 막걸릿집에서 뼈다귀 감자탕을 놓고 마음대로 마시고 당구장과 극장 출입도 완전 자유의 천지였다.

1960년대 국산담배들. (사진=국가기록원)
1960년대 국산담배들. (사진=국가기록원)

대학입학 이후 배운 담뱃값이 무서운 수준이라 버스 정류장에서 파는 까치 담배 한두 개비씩 사 피우기도 했다. 이처럼 궁색한 용돈에 교수님이 지정해준 참고서나 유행하던 교양서적을 구입할 형편이 못 되는 것이 고통이었다. 이에 청계천 헌책방을 찾아다니거나 아예 참고서 대신에 강의내용을 깨알처럼 메모하여 시험에 대비해야만 했다.

시골 출신이 압도적인 고대 특성상 하숙비가 제때 도착했다는 학우가 드물어 학생증을 외상값에 맡겨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무렵 손쉬운 선택이 가정교사라 매일 신문에 1단짜리 가정교사 광고가 수두룩하게 게재된 것이 당시 대학생 사회의 풍토를 말해 준다.

대학 캠퍼스 바로 옆, 자유당 유력 건설업체인 중앙산업이 건설한 종암아파트 가동 19호에 가정교사로 입주할 수 있었으니 요행이었다. 서울 상대와 이대 출신의 다소 넉넉한 교양 부부댁으로 중3, 초등학교 3년 등 두 명의 학생을 맡았다. 주인댁에서 중3의 ‘낙제점만 면하게 해주면 양복 한 벌 선물’을 약속하여 실제로 생애 첫 양복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양복 집에서 맞춰 대학 졸업 시까지 입을 수 있었다.

1961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4.18기념탑 제막식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1961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4.18기념탑 제막식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대체로 가정교사는 월말에 수당 2500원을 받았다. 그러나 수당을 받기 전에 각종 외상값이 3000원을 넘는 것이 일반적으로 대학 생활이란 외상값의 연속이었다. 막걸리, 짜장면 외상값에 담뱃값과 극장 구경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어렵게 빌려 쓴 빚이었다.

이 무렵 종암아파트 나동에서 허장강, 태현실 주연의 ‘스타탄생’ 영화가 촬영되어 바로 건너편 가동 19호에서 학생 두 명과 함께 구경할 수 있었다. 공부할 시각이 되면 막내 여학생은 아빠 거실로 가서 양담배 몇 개비를 빼내어 ‘선생님 담배’라며 공부 그만하고자 아양을 떨었다. 또 비가 오는 날은 학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려 2km상당의 종암초등학교 교정까지 업어다 등교시킨 적이 있었다.

교양 부부댁에는 이화여대 미대에 다니는 처제가 자주 들러 낯이 익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멋쟁이로 같은 반에 다니는 당시 민주당 정권의 실세로 꼽힌 오ㅇㅇ 의원의 딸이 미스코리아에 당선된 것은 ‘권력형’인 것 같다고 입을 삐죽거렸다. 어느 봄날 전 가족이 승용차 편에 소요산으로 나들이를 가니 동행하자고 처제가 제안했지만 불편하여 사양했다. 

이때 하루 3차례 나오는 수돗물을 “잘 받아 놓으라”고 처제가 요청했지만 깜박 잊고 말았다. 저녁에 가족이 귀가했을 때 교양 부부님은 별말씀이 없었지만 처제가 대신하여 “수돗물을 안 받아 놨으니 어쩌느냐”며 잔소리가 심해 얼마 뒤 이불 보따리를 챙겨 가정교사 댁을 나오고 말았다. 그 뒤에도 몇 군데서 다시 가정교사를 했지만 참고 견디는 성미가 못되어 일찍 그만두기를 되풀이했으니 ‘성격 탓 고생길 행군’인 셈이다.  (배병휴 기자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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