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매 주말마다 부산 서면의 롯데 백화점에 간다. 아이가 그곳 문화센터에서 주산을 배워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일 년에 한 번 갈까 말까했던 백화점을 매주말마다 가다보니 감염병의 추세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요동치는 사람들의 소비 심리랄까, 소비자들의 출렁대는 마음이 어슴푸레 감지된다. 야외 마스크 해제를 앞에 뒀던 4월 마지막 주말엔 전 층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화장품과 명품으로 채워진 1층부터 한산한 층이 없었다. 다들 화장품과 향수를 테스트해보고 구두를 신어보고, 딸의 표현을 빌리면 “샬라라”한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고르는 데 열심이었다. 물론 일행 중에 남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쇼핑객의 절대다수는 젊은 여성들이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페르소나'의 아이유 모습. (사진갈무리=Netflix)
넷플릭스 오리지널 '페르소나'의 아이유 모습. (사진갈무리=Netflix)

마스크는 벗는 것의 두려움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는 것이 이렇게 쇼핑을 재촉할 일인가 싶지만 젊은 여성이 외모에 신경 쓰는 문제는 쉰을 넘긴 남자가 섣불리 판단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필자는 요즘 몸소 이 진리를 체험하고 있다. 어린이날 선물로 화장품을 사달라는 열한 살짜리 딸과 4월 한 달 내내 지난한 협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딸은 잠시 옷을 사달라고 물러섰다가 다시 색조 화장품의 카드를 꺼내고, 눈치를 보며 잠시 선크림 정도로 퇴각했다가 다시 색조 화장품의 전선을 다시 펼치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 사이 요즘 유행하는 버킷 햇(bucket hat)이라는 모자와 스커트, 아가일 무늬의 베스트 등이 협상의 부수적 옵션으로 끼워지기도 했지만 핵심 쟁점은 늘 색조 화장품이었다. 어린이가 어린이날 선물로 색조 화장품을 사달라는 이 부조화적인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그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아빠는 이 한 달간의 협상 기간 내내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제 갓 십 대에 접어든 딸이 이럴진대 야외에서 마스크 벗는 날이 확정 된 후 젊은 여성들이 갖게 된 초조함은 오죽할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성형외과와 헬스클럽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피부과 예약도 꽉 찼다는 뉴스가 유난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다만 그 깊은 심리가 무엇인지 광고하는 사람 입장에서 궁금할 뿐이다. 그 손바닥만 한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으면 얼마나 가렸다고 그 얼굴의 공개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딸에게 전해 들으니 “마기꾼”이라는 말이 요즘 십 대들 사이에 유행인 모양이다. 마기꾼이란 마스크를 썼을 땐 예쁘고 잘 생겨 보이지만 벗으면 그렇지 않다고 판단되어 마스크 쓴 얼굴을 마치 제 얼굴인양 들이대며 자랑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셀기꾼”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건 스스로 찍은 사진과 실물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큰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일부 언론에선 마스크로 만들어낸 자신의 정체성을 페르소라는 말을 가져와 “마르소나”라 표현하고, 또 마스크를 벗었을 때 잃게 될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기 위해 “마실감”이라는 단어도 만들어 쓴다.

마르소나와 진짜 자유


마르소나라는 말을 만들기 위해 빌려 쓴 페르소나는 칼 융이 원조라 할 수 있는데, 그는 페르소나의 원천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개인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사회적 관습에 맞게 적절히 하는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사회적 야망으로 스스로 적절하다 싶은 가면의 선택이다. 융이 말한 페르소나의 기원이 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페르소나, 즉 마스크는 우리의 마스크와는 다르게 입은 보이고 나머지 얼굴은 안 보이는 구조였다. 배우들이 대형 야외극장에서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목소리 전달이 중요했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입을 제외한 가면의 다른 얼굴 부위의 묘사를 통해 캐릭터의 외형적 특징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배우의 목소리 또한 이 마스크로 전달되는 이미지에 부합되어야 했다. 결국 페르소나에는 가면의 외형과 함께 그에 걸 맞는 메시지와 커뮤니케이션 방법 및 기술까지 포함된 것이라 봐야 한다.

카를 융, Carl Jung(1912). (사진=위키피디아, 저작=퍼블릭도메인)
카를 융, Carl Jung(1912). (사진=위키피디아, 저작=퍼블릭도메인)

이렇게 페르소나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흰 색 마스크를 벗는 것이 자유나 해방감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외모 관리 강박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마음이 이해 간다. 애초에 흰 색 마스크를 쓰지 않았을 때 누렸던 자유도 진짜 자유는 아니었고, 세상에 보여주던 민낯도 엄밀히 말하면 날 것의 얼굴 그 자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행복의 형이상학>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 우리가 애쓰면 더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유에 대해 “세계가 제시하는 자유는 상품들의 유통망에서 마련된 것에 사로잡힌 자유,”이고, “그러한 생산에 입각해 화폐의 추상을 제도화하는 어떤 것에 기입되거나 미리 기입되어 있는 이상, 세계는 우리가 자유로운 사용이라 명명할 수 있을 무언가에도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이상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시장이 제시한 선택의 폭, 그 안에서 누리는 자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이다.

흰 색 마스크를 쓰기 전에도 우린 계속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오히려 그 흰 색 마스크 덕분에 페르소나라는 마스크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절감 됐었다. 외모와 억지 미소를 꾸미기 위해 들였던 정서적 낭비도 줄었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마스크를 벗으면서 자유를 찾게 된 것이 아니라 다시 저 페르소나의 비용, 사회라는 대형 극장에서 주어진 배역을 완벽하게 연기하기 위해 필요한 외모와 소품을 준비하는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굴레에 다시 들어가게 됐다.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더 큰 속박의 세계, 우리가 이미 그 전에 속해 있던 그 속박의 세계로 다시 귀환하게 된 것이다.

나답게 사는 법


지난한 협상이 계속되던 어느 날, 딸은 <인스타그램>과 <틱톡>을 협상 목록에 끼워 넣었다. 참다못해 딸의 얼굴을 똑바로 하고 나지막이 얘기해 줬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평범해지는 것이야. 평범해지는 것은 남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그저 남을 흉내만 내면 되기 때문이지. 반면 특별해지는 것은 어려워. 그건 나답게 사는 것인데 대부분 사람들이 나다운 것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답게 사느니 평범해지는 쪽을 선택하는 거야. 넌 이제 겨우 나다운 것이 뭔지 알아가는 나이인데 왜 벌써부터 이런 친구, 저런 친구, 이런 선배, 저런 선배를 따라 흉내 내려해. 널 엄마가 얼마나 예쁘고 특별하게 낳아줬는데 왜 그걸 모르고 다른 이랑 똑같아지겠다는 거야.”

아이가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딸들을 향한 아빠의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세상의 모든 청춘들을 향한 어른들의 마음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만하면 됐다. 그만하면 충분히 세상과 어울린다.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고 살아라.’ 이런 마음으로 이 시대의 청춘들을 보고 있을 것이다. 실외에선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는 정부의 말에도 남에 눈치를 살피며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청춘들을 보며 또 한 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 첫날 마스크를 안 쓰고 학교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 간 사람은 딸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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