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중인 Carlos Kleiber. (사진 갈무리=유튜브 동영상)
지휘중인 Carlos Kleiber. (사진 갈무리=유튜브 동영상)

[강규형(명지대 교수, 서울시립교향악단 이사장) 칼럼@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카라얀과는 정반대의 삶을 산 ‘음악계의 이단아’ 카를로스 클라이버 Carlos Kleiber.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그는 은둔 생활 끝에 2004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명 지휘자 에리히Erich 클라이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치 체제를 반대한 아버지를 따라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자랐으며, 이름도 원래는 독일식 카를Karl이었다가 스페인어식인 카를로스로 바꿨다. 덕분에 그는 2차대전의 전화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청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아버지 에리히는 자신의 아들이 음악하는 것을 지원하지 않았기에, 카를로스는 정통적인 음악교육 과정을 밟지 못하고 자라났다. 하지만 재능을 숨길 수 없었는지 혼자서 음악을 하다가 대 지휘자로 성장한 독특한 경우이다. 마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가 자기 아들들이 음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음악을 한 장남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위시해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능가하는 작곡가-지휘자가 됐던 경우와 비슷하다.

예전에 나는 (사실 전혀 그렇지 않지만) ‘내가 만약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면’ 황제와 같은 지위를 누렸던 카라얀보다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인의 삶을 살았던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훌륭한 지휘자들은 많았지만,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음악팬 마음속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상임 지휘자로 한 연주단체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해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지휘자였고, 아주 가끔 레코딩을 했는데 그가 한 연주 레코딩은 매번 전설적인 위치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그는 판을 거의 남기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유산들은 음악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의 데뷔 레코딩(도이치 그라모폰)은 ‘마탄의 사수’라고 불리는 독일 국민주의 오페라의 시조 격인 작품,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자유 사수>이었다. 야노비츠, 마티스, 슈라이어, 아담 등의 독일계 명 성악가와 같이 연주한 이 판은 아직도 명반의 위치에 있다. 그 이후 녹음한 베토벤 교항곡 5번, 7번, 4번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코딩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아서 더 신비롭게 보인 측면도 있지만 그의 연주는 대부분 위대했다. 더 많은 레코딩과 더 많은 실황연주를 할 수도 있었지만 연주와 녹음에 필요 이상의 만전을 기하는 완벽주의자여서 그의 판들은 수가 적다. 음악계의 은둔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자유인으로 살았던 그의 정열적인 지휘가 새삼 그리워진다. 폴 뉴먼 닮은 잘 생긴 외모와 멋진 지휘 스타일로 인기를 더 누렸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기행(奇行)으로도 유명했고, 같이 일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음악가이기도 했다. 돈과는 초연한 삶을 사는 듯했으나, 어떤 때는 터무니 없이 높은 개런티를 요구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거의 지휘를 안 했으며 동유럽 슬로베니아의 후미진 곳에서 살다가 거기서 사망했다. 사망한 곳에 있는 그의 묘지는 슬로베니아 중에서도 아주 깊은 산촌에 있어서 찾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은둔자에 이단아였던 그다운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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