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고백하던 시절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 후회는 없다. 젊은 날의 서투름으로 귀한 연인을 놓쳐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는 있다. 얼마간은 의도했고, 어느 정도는 부지불식간 연인의 마음에 입혔던 상처에 대해서도 후회가 있다. 메마른 오죽(烏竹)을 휘둘러 귀신 쫓아내듯 맘에 없던 말로 연인의 맘을 후려쳤던 것에 대해서도 후회가 있다. 갓 쉰을 넘긴 나이까지 살면서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후회되는 일은 많지만 고백을 못해서 놓친 사랑은 없다. 김동률의 노래처럼 취중에 고백한 적도, 몇 년이 지나서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고민한 적도 없다.

(사진=이톡뉴스DB)
(사진=이톡뉴스DB)

그 자신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따져 물으면 할 말은 없다. 신경림 시인의 <가난한 사랑의 노래>처럼 가난하다고 외로움을 모르기는커녕 그 외로움이 더 사무쳤기에 불현듯 나타나 일상을 휘저은 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궁핍했던 시절에 사랑만큼은 풍요롭길 바라서였는지도 모른다. 서예가 취미였던 옛사랑이 직접 붓을 밀어 쓴 글에 담긴 김동명 시인의 <수선화>에 나오는 “부칠 곳 없는 정열을/가슴 깊이 감추이고/ 찬 바람에 빙그레 웃는 적막한 얼굴”을 내게서 본 사람이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애달픈 마음”을 안아주려 선선히 품을 열어주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고백을 한 사람도 받아준 사람도 대책 없이 용감했던 시절이었다. 느리게 간 마음만큼 답도 머뭇되며 왔지만 천천히 타오른 사랑이 오랫동안 식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다.

고백하지 못한 사랑


불행히도 모든 사랑이 고백되진 않는다. <시라노>처럼 끝끝내 고백되지 못한 채 아픔과 의문만 남기는 사랑도 있다. <시라노>는 에드거 앨런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와 함께 라캉과 그의 학파, 관련 정신분석학자들이 단골로 다루는 문학 작품 중 하나다. 왜일까? 왜 그렇게 이 기묘한 사랑 이야기에 분석의 현미경을 들이대는 걸까? 우선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코가 큰 칼잡이이자 요즘 말로 하면 직업 군인인 시라노는 자신의 사촌 록산느를 짝사랑하지만 자신의 신체적 콤플렉스인 큰 코 때문에 고백을 미룬다. 그러다 우연히 동료 군인인 크리스티앙이 록산느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말주변도 글 솜씨도 없는 그를 대신해 연애편지를 써준다. 록산느는 편지의 발신인만 알뿐, 누구의 영혼으로부터 그 내용이 나왔는지 알지 못한 채 크리스티앙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이후의 얘기는 비극의 연속이다. 크리스티앙은 전쟁에서 죽고 록산느는 수녀원에 은둔한다. 살아남은 시라노는 15년 동안 매주 한번 그녀의 말벗이 되어주기 위해 수녀원에 찾아간다. 수녀원에 가던 어느 날 테러를 당하게 되고 다친 몸을 이끌고 록산느를 찾아간다. 서서히 죽어가던 시라노는 어둠 속에서 크리스티앙이 보낸 마지막 편지를 낭독한다. 그때서야 록산느는 편지에 담긴 마음의 발신인을 눈치 챈다. 그러나 끝끝내 시라노는 그 사실을 부인한 뒤 죽는다.

문제는 죽으면서 한 마지막 대사였다. 그 대사는 그야말로 관객을 멘붕에 빠트렸다. “다 빼앗겨도 한 가지만은 내주지 않으리라. 나의 이 깃털 장식만은!” 사랑도 문학도 명성도, 아니 하다못해 칼솜씨도 아닌 깃털 장식이라고? 도대체 깃털 장식이 뭐기에 내주지 않겠다는 걸까? 시라노가 살았던 17세기의 프랑스에서 깃털 장식은 귀족, 군인, 시인의 상징이었다. 이 세 부류의 인간은 자유, 명예, 이상을 위해 싸운 동료들이었다. 진정한 귀족과 군인과 시인이라면 이것을 위한 투쟁은 존재의 이유였고 자존심이었고 의무였다. 결국 시라노가 말한 깃털엔 그의 생을 지탱한 자존심과 생의 이유가 응축되어 있었다.

사랑보다 소중한 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황당하지 않나? “그럼 사랑은? 록산느는?”하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사랑이 저 자존심이나 명예보다 소중한 것일까? 이 질문에 자답을 해보련다. 우연히 <그 해 우리는>이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봤다. 서로의 처지가 달라 헤어졌던 남녀가 훗날 다시 만난다. 그날 “우리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면 덤덤히 지나칠 사이냐?”라고 남자가 묻는다. 이 말에 여자는 슬픈 독백을 한다. “우리가 헤어진 건 다 내 오만 때문이었어. 너 없이 살 수 있을 거라는 내 오만.”

나이 들어 <시라노>를 다시 보고 생각하니 라캉의 무리들이 왜 그렇게 이 희곡과 영화를 곱씹었는지 이해가 간다. 사랑은 자신을 부수어 내어 주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파괴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 파괴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고백을 미루고 짝사랑을 한다. 자기 멋대로 존재를 이상화하여 흠모한다. 타자가 소중해서 차마 고백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파괴될까 두려워 고백을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이런 짝사랑을 한다. 사랑보다 내가 더 소중한 사람이 이런 짝사랑을 한다.

시라노(1965년작) 북커버
시라노(1965년작) 북커버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연약한 사람이고, 연약한 시라노는 깃털을 빼면 딱히 내세울 게 없는 인간이었다. 숭고하다고? 박찬국 교수의 책 <초인 수업>에 담긴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 시라노와 같이 신념으로 생을 지탱하는 “모든 종류의 믿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의존적인” 인간이다. 이런 종류의 인간의 본능은 “자기 소멸의 도덕에 최고의 명예를 부여”하고 “확신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 시라노 또한 그러했다. 자신의 명예와 도덕, 신념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희생했고 깃털에 의지했다. 그가 전장(戰場)에서도 계속 편지를 썼던 것도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가 그의 고결한 명예를 더 높여줬기 때문이다. 오만과 자기애의 극치다.

죄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그러니 지금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도, 지금의 처지 때문에 그 고백을 밀쳐내는 사람도 오만한 사람이다. 사랑 없이도, 아니 사랑이 없어야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희경의 글을 빌려 말하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노희경의 쓴 동명의 글에는 한 여자가 나온다. 그 여자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그녀가 말하길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노희경은 회개한다.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한 죄를. 그녀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하며 스스로에게 형벌을 내린다.

우리들의 블루스 메인포스터
우리들의 블루스 메인포스터

우리에겐 미처 말하지 못한 사랑이 있다. 미처 말하지 못한 감사함이 있다. 미처 말하지 못한 미안함이 있다. 그 말을 들어야 할 누군가가 영원히 머물까? 시라노에서 봤듯이 운명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요즘, 딸에게 사랑을 배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샤릉해.”라고 말하는 딸에게 말하는 사랑, 사랑의 말함을 배운다. 담임선생님이 물었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네 반에서 혼자뿐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부산 사나이라도 해도 너무 이르다. 벌써부터 사랑한다는 말이 월례 행사가 됐다니. 다시 말하지만 말하지 못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 회를 보라. 다하지 못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 후회를 남기던가. 특별히 청춘에게 부탁한다. 두려움 없이 오늘, 사랑한다고 말하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 순간뿐이니까. 내게도 아직 말하지 못한 사랑이 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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