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잊힌 영화 한 편
(La libreria, The Bookshop, 2017)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이 시국에 개봉도 못해보고 사라진 영화가 한 두 편이 아니고, 어렵사리 개봉했어도 흥행은커녕 홍보 뉴스 한 꼭지 타보지 못한 영화도 수두룩할 것이다. 이런 영화 중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쉬운 영화를 하나 꼽자면 단연 이 영화다. 

북샵 스틸컷.
북샵 스틸컷.

줄거리는 단순하다. 플로렌스라는 미망인이 남편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외진 바닷가 마을 하트 러버에 서점을 연다. 작은 마을 공동체가 종종 그러하듯 이 마을도 소위 지역 유지를 자처하는 인간이 있고 마을 공동체랍시고 대를 이어가며 그 유지를 둘러싸고 폐쇄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는 무리가 있다. 또 그런 무리들이 싫어 공동체와 떨어져 자신의 상처를 품고 혼자 고독하게 살아가는 이도 있고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마을에 무슨 서점이냐며 타박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책방은 그럭저럭 꾸려진다. 지역 유지인 바이올렛이 그 서점을 문화센터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실현키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쓰기 전까지는. 화병이 날까 싶어 영화의 세세한 내용을 중간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서점은 문을 닫고 플로렌스가 떠날 때 그 낡은 집은 불에 탄다.

공동체가 외면한 존재


여운이 길다. 그 여운은 외로움의 그림자다. 책을 사랑하는 플로렌스와 중년 신사 에드먼드 브런디쉬는 외롭다. 두 사람은 책을 매개로 소통하지만 서로의 심리적, 물리적 공간을 존중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물리쳐야 될 감정도 아니고 타인이 함부로 들이닥쳐 철거하고 청소하듯 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외로움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에겐 그럴 자유가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 공동체 속에서 외롭지 않은 이들도 실은 외롭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수다를 떨고 연애하고 사교계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렇게 서로가 공고히 연결 되어 있다고 믿는 이들도 그 내면은 황폐하다. 모두가 연결 되어 있지만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않는다.

사교계를 들락거리는 것이 소통의 질과 양을 높이는 건 아니다. 한 마을에서 같이 농사를 짓고 계절을 겪으며 나이를 먹는다고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고 같은 감동과 생각을 품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교 활동으로 외로움이 해결이 안 되는 이유는 부와 계급으로 형성 된 위계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표현을 빌리면 지적/경제적/사회 자본의 소유 여부와 그 소유양은 사람마다 다르다. 공동체 구성원 간의 이러한 불균형은 앞서 말한, 소통 없는 커뮤니케이션과 그 장(場)을 관례와 장식으로 격하시킨다.

개별 구성원, 즉 개인과 주체의 생각이 이런 관례와 장식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름 고유의 의견을 갖고 있어야만 하고 그 의견이 공동체 내에서 존중되어야만 한다. 개별 의견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 영화의 주민처럼 지역 유지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면, 그 공동체는 전체주의, 파시즘의 물결에 휩쓸려 살게 된다. 책 속의 외로움을 선택한 이가 이런 파시즘적인 마을 들어오자, 소위 외삽(外揷) 되자 공동체는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불안을 가져오기에 외삽 된 존재는 탄압된다. <북샵>의 마을에서 행해진 일은 그 탄압이 불러온 파국이다.

북샵(La libreria, The Bookshop, 2017)
북샵(La libreria, The Bookshop, 2017)

 

고유한 '사유'의 역할


고유한 존재는 외롭고, 외롭다는 감정은 그 자체로 고유하다. 물론 영화에선 “책을 읽을 땐 그 안에 살게” 되기 때문에 “누구도 서점에서는 외롭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서점에서 외롭지 않은 이는 서점 밖에선 외로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주체의 고유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필연이고, 규범적 도서 목록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책 세상과 고유의 사유 체계를 만들려는 이의 운명이다.

그 외로움을 알면서도, 딸이 서가에서 방황하게 놔둔다. 필독도서 목록을 들고 꼭 필요한 책을 찾고 나면 끌리는 책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그렇게 우연히 책과 만나는 순간을, 우치다 타츠루는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서 책과 눈이 맞는 것이라고 했다. “책방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책과 눈이 맞는’ 일이 있습니다. 저자 이름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고, 서평도 읽지 않았는데 ‘책과 눈이 맞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눈이 맞는 책은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운명처럼 만난 책이다. 다시 우치다 타츠루의 말을 빌리자. “무슨 일이 있어도 책과는 우연히 만나야 합니다....여름방학 과제로 읽어야 해서 읽은 책도, 찬사 가득한 서평을 받은 책도 안 됩니다.”

이렇게 우연히, 운명처럼 만난 책들로 한 인간의 사유는 고유해진다. 그 고유한 사유를 간직한 인간의 역할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정신의 삶>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유의 바람’의 구체화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추함, 옳음과 그름을 말하는 능력”이며 이 능력으로 인해 주체와 주체가 속한 공동체는 명백한 “판단이 탁자 위에 있는 흔치 않은 경우에도 최소한 자기를 위해 파국을 방지”하게도 한다고. 한 개인의 고유한 사유는 사적인 파국만 막는 것이 아니다. 저 영화 속 작은 마을, 그 공동체의 파국도 막을 수 있다.

시장(market)의 인문학


다시 말하건 데, 서점에선 누구도 외롭지 않다는 말은 서점을 방황하는 이는 서점 밖에선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읽혀야 한다. 그러니 외로움의 도피처로 인문학 모임이나 독서클럽을 선택할 일이 아니다. 이런 종류의, 그러니까 토론과 논쟁 없이 두루뭉술한 말의 상찬 뒤 뒤풀이나 하고 헤어지는 사교모임 같은 인문학 모임은 등산 후에 막걸리 한 잔하고 헤어지는 친목 도모를 위해 형성 된 산악회와 별 다를 게 없다. 유행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이런 종류의 독서모임과 인문학 모임은 책의 선택과 커리큘럼을 대중의 입맛에 맞춘다.

애들 명작 동화 같은, 긍정과 성취가 넘쳐나는 탄산음료 광고를 닮은 시장과 트렌드에 영합하는 이런 인문학은 과일 향 가득한 라들러 맥주를 닮은 흐트러짐과 흔들림을 허락하지 않는 인문학이다. 그 인문학은 외로움과 같은 고유한 감정 또한 허락하지 않고 일상에 균열을 내지도 않는다. 플로렌스 같은 낯선 외부자를 만들지도 않고 공동체의 흔들림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시장의 인문학은 부정(否定)이 없는 인문학이다. 누군가를 불편하게하고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없는 인문학은 상품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문학 붐이 일어난 후 우리 사회가 더 나아졌는가에 대한 물음에 그렇다고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저 쓴 맛 없는 인문학과 그런 모임에서 찾아야 한다.

영화 스틸컷.
영화 스틸컷.

 

자기만의 인문학 레시피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플로렌스가 배를 타고 마을을 떠날 때 서점은 불에 탄다. 그 서점에서 일하던 소녀가 어른의 부조리한 세계를 목격한 후, 주인공을 부두에서 배웅한 후 그 길로 돌아가 서점에 불을 지른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이들에게 서점이 필요 없고, 독서가 부재한 곳에 문화센터가 추구하는 문화가 임재할리 없다. 소녀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독서와 인문학 또한 그렇게 불을 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타버린 뒤 남은 빈 터에, 낯설기에 외로울 수밖에 없는 새로운 뭔가를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최진석은 인문학을 사람이 그리는 무늬라고 했다. 수유너머의 멤버들이 쓴 <불온한 인문학>에선 문화교양주의를 벗어나서 세상과 현실, 구조에 대한 날선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을 만드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했다. 결국 책을 읽고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과거의 그 무늬를 깊이 알아 지금 내 인생의 무늬를 좀 더 낫게 그려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그려진 개인의 인문지도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고유의 레시피가 된다. 그렇게 각자가 더 나은 무늬를 그려나가고, 고유의 삶의 레시피를 축적해가면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다양한 맛이 공존하는 살 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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