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올봄에 한 달 터울로 두 번의 강연을 했다. 하나는 시의회의 온라인 서포터스를 위한 글쓰기 강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만간 20년 차가 되는 카피라이터의 여러 노하우를 일반인과 공유하는 강연이었다. 같은 사람의 두 번의 강연이었지만 장소와 청중, 시기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달라 나 또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섰다. 이쯤 되면 <놀면 뭐하니?>의 유재석 부럽지 않은 변신 아닌가?

제자의 이름을 바꾼 이유


얼마 전 내게 강연의 기회를 준 기획사의 CEO와 차를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이 변신 이야기가 나왔고 종교 이야기로 이어지다가 성경 속 인물들의 이름이 바뀐 의미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나아갔다. 성경 속 인물 중엔 이름이 바뀌거나 별칭을 받은 인물들이 많다. 예를 들어 시몬은 베드로로, 사울은 바울로 바뀌었다. 제자 요한의 경우엔 별칭으로 보아너게,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기도 했다. 구약엔 더 많다. 대표적으로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솔로몬은 선지자 나단을 만난 뒤 여디디야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다른 종교에서도 본명 대신 부르는 이름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세례명이 있고, 불교에서는 법명이 있다. 다른 이름을 부여받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사진=이톡뉴스)
(사진=이톡뉴스)

 

세속에서 부름 받는다. 호명(呼名)을 들어 소명(召命)을 받는다. 세상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신의 부름에 응답해서 왔기에 그 이름으로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없다. 세상의 이름은 지어 준 부모도, 이름의 주인도 왜 그 이름이어야만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바람을 담을 뿐이다. 작명원에서 지어준 이름 또한 사주팔자와 그날의 기운을 종합하여 그리 살게 되길 바라는 염원을 담을 뿐 실제로 그 이름의 주인이 그리 살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내 존재의 이유를 정확히 알아 소명을 준 신은 당연히 세상이 준 내 이름을 버리라 할 수 있다. 초월적 존재만이 인간의 존재 이유를 안다는 믿음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리 생각하니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생업의 현장으로 갔던 것도 이해된다. 날 제자로 불러내어 새 이름을 지어준 초월적 존재가 사라졌다면 원래의 이름이 얻은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라고 여겼을 테니 말이다.

나를 찾고 싶은 순간


그렇다. 인간은 이름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어디 이뿐인가. 태어나보니 이미 삶의 많은 조건들이 정해져 있다. 나와 보니 이 땅에 이 부모다. 부모의 DNA와 경제력, 주변 환경 등이 제법 갖춰져 있다. 누구는 아빠 찬스, 엄마 찬스 쓰면서 스펙을 쌓은 뒤 탄탄대로를 걷지만, 어떤 이는 얼마 전 TV에 나왔던 아나운서처럼 백 번의 시험 끝에 방송국에 합격한다. 이렇게 주어진 이름과 조건, 여기에 자신의 노력과 함께 운과 불운의 굴곡을 겪으며 살다보니 지금까지 왔다. 우리의 삶은 이렇듯 -페북 친구 정지영 씨의 표현을 빌리면- “나 하나 움직이는 이유도 다 알기 전에 불려 가는” 삶이다. 내 삶의 목적을 정확히 알아 새로운 이름을 줄 수 있는 초월적 존재를 만나기 전까진 세상이 내모는 데로 사는 게 삶인 것이다. 이런 삶을 살다보면 초월적 존재를 대면할 기회가 없는 주체는 “난 누구인가?”, “지금의 내가 정말 나인가?”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런 답 없는 질문에 심난할 때 자유자재로 부캐를 생산하는 유재석을 보면, 대리만족과 함께 부캐에 대한 욕망이 싹트게 된다. ‘그래 나도 한번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보자.’, ‘내가 왕년에 음악도 좀 했고, 흥도 좀 있으니 디제이로 한번 나서보자.’, ‘글 솜씨하나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는데, 이제라도 작가로 나서보자.’ 이런 구체적인 생각들을 하게 된다.

결국, 부캐를 향한 욕망, N 잡러의 꿈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투잡/쓰리잡이라는 말이 생계의 해결과 여윳돈의 마련을 위한 밤낮 없는 노동을 의미하는 맥락에서 쓰였다면, N잡러는 자신의 취미와 특기를 살려 다양한 일을 하여 수익 창출과 함께 자아실현까지 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 자신이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의 확장과 그 외연이 더 넓어질 기회의 획득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하나의 이름과 직함, 직업과 직장에 갇히지 않고 열린 가능성을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나를 수식하던 명사들


물론 우린 부캐를 꿈꾸기 이전에도 이미 많은 명사들로 자신을 수식하며 살아왔다. 철학자 이정우의 <주체란 무엇인가>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우리의 “인생이란 이런 술어(述語)들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이 투쟁 속에서 “경쟁의식, 질시, 험담, 모함을” 겪으며 산다. 그 속에서 “우월감/열등의식”을 냉탕 온탕 오가듯이 겪었고, 그러다 “증오심”과 “집착하는 자아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런 “술어적 주체로 구성되는 사회/세상이라는 곳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누구도 이런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고통 속에서 살아왔기에 유재석의 자유로운 부캐 생산에 우린 그렇게 열광하는 걸까?

이 열광에 도취되어 꿈에 그리던 부캐를 만들기에 앞서 우린 문득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정말 원하는 술어를 향해 새 걸음을 떼어도 괜찮은 걸까?” 다시 이정우의 지혜를 빌리자. 그는 "산다는 것은 곧 겪는다는 것이고 겪는다는 것은 시간의 지평 위에서 끝없이 생성하는 차이들을 겪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해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고 “타자와의 마주침에 충실할 때 주체는 반드시 해체되어 갈 수밖에 없으며 열려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분열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은 이 해체 속에서 동일성을 만들어가고, 결국 이 차이 생성과 동일성의 투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성립하며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 부캐가 됐든,N잡러가 됐든 두려움 없이 나아가자. 그 또한 나 자신으로, 새롭게 만나는 나 역시 나로 수렴되니 말이다. 이런 나와 타자를 구성하는 술어의 관계망을 이정우는 “술어의 그물”이라고 했다. 이 그물을 벗어나는 삶을 모두 꿈꾸겠지만 결국 우린 그 그물의 다른 위치에 자리할 수 있을 뿐이다.

법정스님 대학시절 독사진. (사진=연합뉴스)
법정스님 대학시절 독사진. (사진=연합뉴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이 그물을 벗어날 순 없을까? 어떤 명사 없이 그저 나 자체로, 부캐든 N잡이든 뭐든 다 벗어버린 진짜 나를 찾을 순 없을까? 이를 위해선, 법정 스님의 책 제목이기도 한 <숫타니파타>의 구절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아야 한다. 매번 “그물을 찢고 나오는 물고기처럼” 매일 새롭게 살아야 한다. 법정 스님은 이런 삶에 대해 같은 책에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물속의 물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라”라고, “이것은 집착이구나, 여기에는 즐거움도 별로 없고 괴로움뿐이로구나,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싯밥이구나. 이렇게 알고 미련 없이 떨쳐버리면서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이런 새로운 시작을 통해 인생은 거듭거듭 되살아나고 “묵은 버릇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때 새 움이” 트며 인간의 봄이 찾아온다고 하셨다. 권택영이 <생각의 속임수>에서 말했듯이 우리 몸이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듯이 내 마음 또한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며 머물지 않고 새로움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부캐, 새로운 나,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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