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사진=필자 제공)
능소화. (사진=필자 제공)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능소화가 피었다. 꽃을 보니 배운 것이 생각난다. 이웃이 정성들여 키운 능소화가 담장을 넘어 골목을 환하게 하는 것을 보며 배웠다. 아프지 않고 무탈하고 건강하며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자라는 딸을 보며 배웠다. 딸이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한 후 함께 동네를 거닐며 꽃을 알아가며 배웠다. 아이가 크는 것도, 철따라 기다리던 꽃이 피는 것도 당연하지 않기에 깊이 감사해야 함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기에 당연해 보이는 것에도 감사해 마땅하다는 것을 마흔이 넘은 뒤에야 배웠다.

딸과 함께 배운 꽃들


딸을 키우기 전엔 능소화를 몰랐다. 능소화 뿐이던가, 대부분의 꽃을 몰랐다. 내 지인은 꽃을 좋아하게 된 날보고 중년의 징후라 놀렸다. 허나 아들을 키우는 그는 모를 것이다. 딸은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묻는다. 말을 하고 걸음마를 뗀 딸과 함께 거닐기 시작하면, 그제 서야 비로소 계절마다 다른 꽃이 핀다는 걸 알게 되는 이유다.

나 또한 그랬다. 집에서 좀 오 분 정도 걸어 나오면 부산시립박물관이다. 그 박물관 건너편 길이 아이의 첫 번째 어린이집 등원 길이었다. 그 길에 아주 오래된 맨션이 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ㅁ자 모양의 3층짜리 맨션이다. 인근에 있는 유엔기념공원 때문에 고도 제한이 있어서 주변에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었던 탓이다. 딸이 네 살 무렵, 봄날의 그 맨션을 지날 때 화단에 핀 꽃의 이름을 처음 물었다. 그 맨션의 화단을 시작으로 십 분 정도 걸어가는 거리의 건물 화단마다 다른 꽃이 피어 있었기에 질문도 이어졌다. 봄날의 맨션 화단엔 금강초롱과 꽃잔디, 앵초와 낮달맞이 꽃이 피었고, 그 옆의 유명한 아구찜 식당 화단에는 바다채송화와 장미가 피었다. 모르는 꽃은 열심히 검색해서 다음에 물을 땐 알려줬다. 봄이면 끝인 줄 알았던 꽃이 이어달리기 하듯 달마다 선수를 바꿔가며 피었다. 벚꽃이 지면 꽃은 끝인 줄 알았는데 그 뒤로도 이팝나무, 조팝나무, 오동나무꽃, 등나무꽃이 피었다.

그렇게 꽃들을 알며 지난 온 몇 달 후 어느 더운 여름 날, 집을 나섰더니 오래 된 우리 집 앞 이층 양옥집 담장 밖으로 나팔꽃을 닮은 오렌지 색 꽃이 길에 닿을 듯이 만발 했었다. 마치 오렌지 주스로 담장이 물든 것 같았다. 당연히 딸은 이 꽃의 이름을 물었다. 오렌지색을 가장 좋아하는 아빠라면 당연히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히 몰랐다. 그 꽃이 능소화다. 이름을 알고 주위를 걸어보니 능소화 천지였다. 능소화는 음력 유월이 지나면 피기 시작한다. 뉴스에서 다가 올 장마를 걱정하고 열대야 대비를 말할 즈음부터 피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 궁궐에 능소화가 피면 궁녀들은 해가 반이 지나도록 임금의 선택을 받지 못했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모든 꽃엔 이야기가 있지만 능소화엔 이렇게 외로운 이의 긴 탄식이 담겨 있다.

어머니의 웃음꽃


어머니를 뵙지 못한지 4년 됐다. 감염병이 아니었으면 딸이 아홉 살 때 뵈러 갔을 것이다. 모두가 공항을 닫고 비행기를 묻어 두던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여섯 살에 봤던 손녀는 4학년이 됐고 3년째 마스크를 쓰고 학교를 가고 있다. 딸이 처음 본 꽃은 바다채송화였다. 어머니가 바다채송화를 처음 본 건 몇 년 전 한국에 오셨을 때 함께 간절곶을 갔을 때였다. 딸이 그 꽃을 처음 봤을 때 감탄하며 그 이름을 물었듯이 어머니 또한 그러셨다. 손녀가 답했다. 그 답을 들으며 “우리 은채는 모르는 게 없네.”하며 손녀의 엉덩이를 두드려 주셨다. 이 때 뵙고 못 뵈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늙으셨다. 화상 통화를 할 때마다 그것이 제일 먼저 보인다. 어깨와 손목도 아프시다. 이젠 몸을 움직여 뒤뜰에 꽃을 심으시고 키우실 여력은 없으신 듯하다. 그저 평생을 키워 오신 신앙의 꽃, 믿음의 열매를 맺으시며 사시는 말년이자 손녀와 화상 통화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시는 노년이다.

아들과는 서른 이후부터 곁에서 보질 못하고, 딸과도 그러하다. 외손녀든, 친손녀든 다들 한창 클 때여서 봄비 끝에 올라오는 죽순처럼 하룻밤 자고나면 크는데 그 크는 과정 또한 보질 못하신다. 맞벌이 하는 아들 내외, 딸 내외를 위해 황혼 육아를 감당하는 노년도 고단하겠지만 귀한 손자 손녀의 크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아픔에 비하면 감당할만한 고단이 아닐까 싶다. 그나마 감염병 이전에는 몇 년에 한 번씩 고국에 나와 자식들을 보고, 손녀들을 보셨다. 자주 보면 그 얼굴에 웃음꽃이 더 활짝 필 텐데 그럴 수 없으니, 불효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을 모른다.


이 칼럼을 쓰며 어머니가 무슨 꽃을 좋아하시는지 생각했다. 모른다. 대학 시절 집에 가득했던 초록의 화초들은 기억난다. 어머닌 꽃보다 화초를 좋아하셨던가? 알 수가 없다. 어머니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이 또한 너무 큰 불효다. 아는 게 없으면 얘기할 것이 없다. 일전에 얘기했듯 한 사람이 부재한 뒤에도 그 사람을 우리 곁에 생생하게 소환할 수 있는 건 오직 추억뿐이다. 그 사람에 대한 소소한 기억뿐이다. 어머니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시고, 무슨 꽃을 좋아하시고, 무슨 색을 좋아하시는지 모른다. 불효다. 김진호의 노래를 들으며 울었던 이유다.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을 들으며, <가족사진>을 들으며 울었던 이유다. 나를 키우기 위해 자신의 소소한 취향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살아왔던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며 울었다.

내게 장수의 복이 있는지 모르겠다. 있다면, 잘하면 손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손녀에게 딸에게 그러했듯 이런저런 꽃의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생의 큰 복이리라. 설령 그 손녀를 보기 전 세상을 뜨더라도 딸은 날 기억할 것이다. 봄꽃 중에는 목련과 흰금강초롱을 좋아했던, 여름 꽃 중엔 능소화를 좋아했던 아빠를 추억할 것이다. 자기 딸이 그 꽃을 보며 이름을 물으면 꽃의 이름을 알려주며 “할아버지가 능소화를 참 좋아하셨어. 오렌지색을 참 좋아하셨지.”라고 말하며 날 그리워할 것이다. 난, 할머니가 좋아했던 꽃을 딸에게 말해 줄 수 없기에 나눌 추억이 없다. 이 또한 불효다.

감염병은 여전한데 TV 프로그램은 해외로 나간다. 먼 나라에서 한류 소품도 팔고, 연예인은 자기 가족과도 만난다. 서민들은 아직 언감생심이다. 감염병 시국이 끝났다고 팍팍하던 삶이 갑자기 나아질리 없다. 당면한 생계의 이유들이 먼 곳의 가족들과 만나는 일을 뒤로 미루게 한다. 다들 다음을 기약하며 건강하자. 내년엔 다들 살림살이가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

올 해도 능소화가 피었다. 속으로 울며 그 밑을 지나갔다. 능소화 밑에서 찍은 딸의 사진을 어머니에게 보냈다. 내년 여름엔 능소화 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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