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일본 프로레슬링 전성시대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역도산의 3대제자인 김일,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사진=필자 제공)
사진은 일본 프로레슬링 전성시대 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역도산의 3대제자인 김일,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사진=필자 제공)

[강규형(명지대 교수, 서울시립교향악단 이사장) 칼럼@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안토니오 이노키가 7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는 일본,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 명성을 가진 프로레슬러였다. 

이노키는 전후 일본의 영웅이었던 역도산(力道山, 리키도잔 Rikidozan, 한국명 김신락)의 3대 제자(자이언트 바바, 오오키 긴타로(김일의 일본 이름), 이노키) 중 하나로, 브라질 이민자였다가 소년 시절 역도산에게 발탁돼 일세를 풍미했고 정치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역도산은 3대 제자 중 야구선수 출신인 자이언트 바바를 특히 편애했다. 역도산은 그의 제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면서 키웠다. 그러나 바바에게는 아주 부드럽게 대했다한다. 키 209센티, 신발문수가 16문이라는 바바의 킥은 무시무시했다. 바바를 공식 후계자로 지명하기까지 했다. 아마 셋 중에서 바바가 최연장자였던 것도 이유였을 수 있다. 그리고 김일은 한국인이고, 이노키는 브라질 국적 이민자였고, 바바는 순 일본인이라 바바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후세인들은 이노키와 김일을 더 잘 기억한다.

역도산은 2차대전 패전과 미국의 맥아더 군정 이후 땅에 떨어진 일본인의 자존심을 세워준 인물로 일본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는 스포츠영웅의 수준을 넘어선 일본의 국민 영웅이었다. 전후 풀이 죽은 일본인들은 리키도잔이 몸집 큰 서양 선수들, 특히 미국 레슬러를 이기는 데서 얻는 대리만족과 쾌감을 느꼈다. 세계 프로레슬링 계의 황제였던 루 테즈(Lou Tesz)와 리키도잔의 경기는 전설로 남아있다.

그런데 리키도잔이 조선인이었다는걸 일본인들은 대개 모르고 있다. 그는 함경남도, 즉 이북 출신이라 그런지 친북 친(親)김일성 성향이기도 했다. 이노키가 북한과 교류가 많았던 것도 역도산의 영향이었다. 다행히 이남 출신인 김일은 친(親)대한민국이었다. 김일은 역도산이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곤궁하던 시절 한국인에게 자존심을 세워주고 희망을 선사한 인물이었다. 한국인들은 그의 시합이 있는 날 당시에는 드문 흑백 TV 앞에 몰려 앉아 그가 외국 선수들, 특히 일본 선수들을 압도하는 것을 보고 희열을 느꼈다.

김일, 장영철, 천규덕 등의 한국 선수들과 이노키, 압둘라 부처 같은 외국 선수들과의 프로레슬링 시합은 국민스포츠이자 최고 오락으로 자리 잡았다. 재일교포이자 다이내믹한 쇼맨쉽으로 인기였던 여건부(일본명 호시노 칸타로)같은 선수들도 그 인기에 일조했다. 레슬링이 “쇼(Show)”적인 측면이 많은 게 알려지면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사라졌지만, 한국 현대 사회사에서 레슬링이 갖는 의미는 컸다.

이노키와 김일은 역도산 문하에서 같은 방을 썼던 동료였지만, 링에선 살벌한 앙숙 분위기를 연출했고, 사람들은 그 라이벌전에 열광했다. 정치인으로 성공하고 풍족한 삶을 살았던 이노키와 달리 김일은 노환과 빈곤으로 고생했다. 이노키는 한국까지 찾아와 김일을 병문안하고, 그의 입원비와 치료비를 대주는 훈훈한 우정을 보이기도 했다.

역도산은 1963년 야쿠자의 칼에 맞아 허무하게 사망했다. 이제는 그의 3대 제자들도 다 고인이 됐다. 이노키 사망 소식은 일본과 한국의 올드팬들에게 옛 시절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김일과 이노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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