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와 쓰기가 생각나는 계절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얼마 전 글쓰기 강연 기회가 있었다. 시민이 지역의 문화 시설을 체험한 뒤 기록하는 분들에게 글 쓰는 요령을 간단히 알려달라는 의뢰였다.

주어진 시간이 30분 밖에 없어서 그야말로 간단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보니 성별과 연령층이 다양했다. 20대부터 나보다 더 나이 든 분들도 제법 있었다. 짧은 강연이 끝나고 세 가지 질문만 받겠다는 사회자의 진행 덕에 강연은 한 시간도 안 되어 끝났다. 다들 글쓰기의 의미와 책 읽기의 의미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 느껴졌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을을 맞아 새삼 독서와 글쓰기에 도전해 보고 싶은 이들이 많아지는 요즘, 그러나 새삼 무슨 글쓰기고 독서냐며 망설이는 분들을 위해 그 강연에서 다 펼쳐 보이지 못한 생각과 말들을 여기 옮겨 보려 한다.

SNS를 보면 글쓰기 좋아하는 사람도 왜 계속 글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는 글을 남긴다. 내가 무슨 영화(榮華)를 보겠다고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는지 모르겠다는 이들도 있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이들 대부분은 글쓰기나 책읽기로 한 푼의 돈도 못 번다. 작가의 명예나 자격증, 학위도 따라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책 한 권 내놓은 적도 없다.

운이 좋으면 유명한 포털의 메인에 잠시 올라 갑자기 조회 수가 몇만이 넘거나 글의 주제와 관련 있는 업체나 언론사에서 칼럼을 의뢰받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글재주가 남다르고 시절의 운까지 따라주면 활동하는 플랫폼에서 지원하는 출판 프로젝트에 발탁되어 전자책이나 종이책 출판 기회를 잡기도 하지만 그런 기회가 쉽게 올 리 없다. 그러니, 요즘 애들 말로 “현타”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스스로 할 수밖에 없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않는 한 글쓰기는 지속될 수 없다.

(사진=이톡뉴스DB)
(사진=이톡뉴스DB)

글쓰기가 바꾼 두 여자의 인생


요리하고 글 쓰는 두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 <줄리&줄리아>는 실화가 바탕이다. 줄리아 차일드는 1950년대 전설적인 요리사다. 그녀의 이야기가 더 극적인 건 그녀가 마흔 이전까진 평범한 가정주부였다는 것. 그런 그녀가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프랑스에 와서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이것저것 하다가 운명처럼 요리를 만났고 전설적인 요리사가 된 후 유명한 요리책까지 썼다.

50여 년 후, 줄리 파웰의 이야기도 남다르다. 그녀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만 이렇다 할 결과를 낸 적은 없다. 남편과 함께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삶을 꾸려 나갈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블로그라는 걸 알게 되고 그 블로그에 뭘 쓸까 고민하다가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에 나오는 524개의 레시피를 일 년 안에 다 해내는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그 과정을 쓰기로 한다. 물론 블로그 초창기엔 아무런 반응도 없었으며 사생활을 이야기하다 직장 생활에 문제를 겪기도 하지만 결국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그 과정은 책으로 나온다.

이런 영화를 볼 때 경계해야 할 것은 해피 엔딩만 기억하는 것이다. 상업 영화는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한다. 주인공이 글을 썼으면 책이 나와야 하고 책이 나왔으면 히트해야 한다. 첫 번째 책이 히트하지 않는 역경을 겪으면 두 번째 책은 크게 히트해야 한다. 이것이 상업 영화의 문법이다. 우린 두 여인이 맞이한 해피 엔딩보다는 자기 앞에 놓인 무의미한 시간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그녀들이 선택한 글쓰기에 담긴 의미를 찾아봐야 한다. 인생을 행복하게 하고 빛나게 하는 글쓰기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영화 "줄리 & 줄리아(Julie & Julia, 2009)" 스틸컷.
영화 "줄리 & 줄리아(Julie & Julia, 2009)" 스틸컷.

'쓰기'와 '읽기'의 의미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불과 글>에서 얘기했듯이 사람다움의 한 요소는 무위(無爲)다. 이 무위의 한 자는 없을 무(無), 할 위(爲)다. 여기에서 할 위는 단순히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 한자엔 “다스리다·되다·이루어지다·생각하다.” 등의 뜻이 있다. 즉 무위라는 건 주체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의지가 바탕이 된 행위(行爲)를 아무런 이해관계와 목적 없이 행하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 행위가 재화나 자본을 창출하지도 않고, 정치나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말 그대로 그저 사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 충분하다. 마치 우리가 산에 오르고, 정상에서 전경을 보는 것과 같다. 그저 오르는 것이고 그저 볼 뿐이다. 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건강을 위해서, 자연이 좋아서라는 이유는 그저 무위적 행위인 등산이라는 본문의 각주에 불과하다.

읽기와 쓰기의 순수한 의미 하나가 바로 '무위'다. 읽기와 쓰기는 무위적 행위이기에 사람다운 행위다. 다른 여타 유희처럼 논리적으로 설명될 이유가 없다. 세상의 모든 취미와 여흥이 그러하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 다시 오를 날을 꿈꾸듯이 읽는 사람은 쓸 수밖에 없고, 쓰는 사람은 읽을 수밖에 없다. 읽기는 쓰기의 마중물이 되고 쓰기는 읽기의 동력이 된다. 모든 것이 차면 넘치듯, 삶도 글도 차면 쓰기를 통해 밖으로 흘러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읽기와 쓰기를 생(生)을 드러내는 사태로 선택한 이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읽기의 의미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다. 브런치를 통해 여럿의 글을 읽는다. 그 중엔 매일 경제 뉴스를 요약해서 올리는 사람도 있고, 육아 이야기, 회사 생활, 여행기, 성장기, 요리 일기도 있다. 이선민 작가처럼 삼풍백화점 사고에서의 생존 이후의 삶에 대한 투쟁적 기록도 있다. 그리고 아이디가 free garden인 신민경 작가의 투병기도 있다. 난 그녀의 자기소개 문구를 보고 그녀를 브런치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계 40개국을 오가며 공부와 봉사활동을 하며 새로운 세상, 넓은 세상을 만났다. 그러다 서른도 안 돼 암에 걸렸고 이후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그녀의 투병기는 이미 <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최근엔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단상을 가끔 올리고 있는데, 그마저도 끊긴지 몇 주 됐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난 왜 그녀의 글을 구독해서 읽고 있는가?”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난 왜 죽음을 앞둔 한 여성의 글을 읽는가? 위로하기 위해서인가? 공감하기 위해서인가? 그 글엔 자기 계발/개발도, 경제적 이익도, 사회적 가치도 없다. 소위 잘 먹고 잘사는 법에 관한 글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녀는 손 쓸 새 없이 덮쳐온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나날들을 글로 옮길 뿐이다.

이런 그녀의 글을 난 왜 읽는가? 난 그녀의 글을 통해 타인이 처한 낯선 상황, 사태를 응시한다. 아감벤이 같은 책에서 말했듯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언어를 응시하는 것이라면 읽는 것 또한 그러하다. 그 응시는 문장의 뜻을 깊이 알려 하는 데 목적을 먼저 두지 않고 글들이 펼쳐 보이는 사태와 상황에 대한 응시를 우선으로 한다. 결국 난, 그녀의 글을 통해 죽음을 앞에 둔 시간과 공간을 그녀의 시선 곁에서 함께 응시하고 있다. 동정이나 슬픔은 다음이다. 위로는 내 몫이 아니다. 그저 함께 볼 뿐이다. 그녀의 최후의 글, 설령 출판되더라도 이미 세상에 없을 그녀에게 아무런 명예나 돈도 가져다주지 못할 짧은 글, 그 글을 보는 건, 그렇게 한 주체가 겪고 있는 낯선 사태에 대한 동참이다.

신민경 작가의 브런치
신민경 작가의 브런치

 

'행복'하게 해주는 것


영화에서처럼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 요리를 배우고 요리책까지 써서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다가 꿈을 실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성은 이 두 가지 의미, 그다음에 오는 것이다. 미셀 푸코가 말년에 했던 인터뷰 내용을 빌려 말하면, 글을 쓰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글쓰기에 인생의 행복감이 달렸다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타인의 글을 통해 그가 겪은 시대와 현실과 사태를 간접적으로 겪으며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글을 읽어야만 한다.

그것이 어떤 이익이나 명예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아도 그것을 하는 동안 행복하다면 그걸 해야 하는 존재는 지구상에 오직 사람뿐이다. 무위한 뭔가를 하는 것, 그것은 사람다움의 특징 중 하나다. 더 나아가 그 무위한 것을 하는 사람끼리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는 것도, 그래서 서로의 삶에 약간의 힘이 되어주는 것도 결국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누군가 단풍을 구경하는 동안 누군가는 그 단풍을 등지고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을 것이다. 그렇게 각자가 행복해지는 법을 안다면 이 세상도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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