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는 음주 문화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야 보통의 한국 남자들이라면 예비군이 끝나갈 때쯤부터 종종 하고, 민방위까지 끝나면 그야말로 입에 달고 사는 말이지만 쉰이 넘으니 진짜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사진=etalk news)
(사진=etalk news)

사는 낙 중 하나가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는데 맥주로 들어오는 알코올과 가스 처리를 몸이 슬슬 부대껴 한다. 그러면 양을 줄이면 될 텐데 그게 또 어디 쉽던가. 마라톤을 한창 즐길 때,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여한다는 교훈을 터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주가 보내는 유혹에 번번이 무너져 그 교훈을 잊은 척 하고 마셔댔더니 이제 신호를 보내다 못해 몸이 버럭 화를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맥주에 미련의 눈길을 보내면서, 슬슬 전통주쪽으로 주종을 바꾸려 한다. 그렇다. 술을 끊는 것이 아니라 술의 종류를 바꾸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소재 삼아 술에 대한 글을 하나 남기려 한다.

믿기 어렵겠지만 지난 십 년 간 한국의 주류 출고량은 감소추세다. 그 폭이 상대적으로 크게 감소 됐던 해는 당연히 코로나19가 등장했던 2020년이었다. “한국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신다.”, “술에 대해 너무 관대하다.”와 같은 말을 뉴스를 통해 많이 보고 듣고, 골목 모퉁이만 돌면 술을 살 수 있는 편의점이 많아지다 보니 술도, 주당도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와 시장의 트렌드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일단 집에서 마시는 홈술과 혼술이 많아졌다. 때문에 팬데믹 이후 회식이 줄면서 맥주와 소주의 소비는 감소했지만 위스키, 와인, 전통주의 소비는 늘었다. 몇몇 주류 마케팅 보고서를 보니 이러한 술 소비 경향을 “취향”이 지배하는 “주류 소비 트렌드”라고 분석했고, 이 흐름을 주도하는 무리로 2030세대를 지목했다.

이들은 나 홀로 집에서 한 잔의 술을 마셔도 제대로 차려 마시고, 새로운 술에 도전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과음보다는 가벼운 술자리를 선호하여 저도수 주류를 선호한다고 한다. 맥주 광고조차 “회식에 반대합니다.”라는 카피로 이들 MZ 세대의 비위를 맞추는 걸 보면, 이 보고서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다.

영화 "어나더 라운드(Druk, Another Round, 2020)" 스틸컷.
영화 "어나더 라운드(Druk, Another Round, 2020)" 스틸컷.

 

네 남자의 실험


여기, 이 트렌드에 역행하는 덴마크의 40대 남자들이 있다. 같은 학교 선생님, 유부남 둘에 미혼남 둘이다. 지루하면서도 무난한 일상, 수업에서 사라진 텐션과 열정을 당연시하게 된 네 남자는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술을 마시다 한 논문을 화제에 올린다. 논문의 내용은 혈중 알콜 농도를 0.5정도로 꾸준히 유지하면 삶이 달라진다는 것. 배울 만큼 배운 네 남자, 실험에 돌입한다.

이 나라의 40대라면, 이런 실험, 할만하다. 덴마크의 권태로움은 국가적 현상인 모양이다. 술을 많이 마시는 걸로는 한 때 세계 10위권, 지금도 20위권을 오가고 있다. 그 때문인지, 주인공의 아내조차 온 국민이 퍼마신다고 했다. 자, 생각해보자. 덴마크에 뭔가 자극적인 것이 있던가?

영화 <내 남자 친구는 왕자님>의 대사에 나오듯이 슈퍼모델 헬레나 크리스텐슨과 헤비메탈 밴드 <메탈리카>의 드러머 라스 울리히, 여기에 다홍색 유니폼을 입고 선 굵은 축구를 하는 국가대표팀이 가장 자극적인 “메이드 인 덴마크”이려나.

여하간 이 권태로운 나라의 권태로운 네 남자의 실험, 초반엔 성공적이다. 나아지는 부분이 있다. 권태는 쫓겨나고 수업은 활기를 찾았으며 부부 관계도 좋아졌다. 그러나 거기까지. 어디 술이 “적당히”라는 단어를 아는 놈이던가. 술로 찾은 에너지와 활기, 그놈이 다시 데려가고 뒤에 쓴 맛만 남긴다.

영화 속의 술은 깨운다. 에너지와 열정과 감성과 대화를 흔들어 깨운다. 저 멀리로부터 그것을 불러 온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잠들어 있던 것을 다만 흔들어 깨웠을 뿐이라는 것이다. 술을 마시기 전에도 있던 것, 술의 힘을 빌려 다시 꺼냈을 뿐, 열정도 영감도 사랑도 이 권태로운 네 남자 안에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영화 서두에 나온,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글을 곱씹어 봐야 한다. “젊음은 무엇인가? 꿈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라는 말은 얼핏 생각해보면 젊어야 꿈을 꿀 수 있고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 같다. 이 문장 뒤에 이어지는,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맥주 한 박스를 마시는 레이스와 광란의 지하철 파티로 이어지는 영화 오프닝 씨퀀스는 키르케고르의 말의 현현(顯現)같기도 하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사랑을 하면 꿈을 꿀 수 있고,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평생 젊게 살 수 있다는 거 아닐까?

쿠스미 마사유키(좌)와 나기라 켄이치(우)가 대낮에 맥주를 즐기고 있는 드라마 속 스틸컷.
쿠스미 마사유키(좌)와 나기라 켄이치(우)가 대낮에 맥주를 즐기고 있는 드라마 속 스틸컷.

 

주도의 완성, 그 조건


고독한 미식가 시즌 2의 첫 회, 중화식당 산짱 식당이 나온다. 일본의 평범한 중국집이 라멘과 만두를 판다면 이 집은 안주를 찾는 주당 손님이 대부분이다. 낮 세 시면, 이 주당들로 가게 안이 가득 찬다. 드라마가 끝난 후, 원작자인 만화가 쿠스미 마사유키가 드라마에 나온 식당에 직접 찾아가는 코너가 이어진다. 이 회에도 원작자는 그 소란스러운 식당을 찾아갔다. 조심스레 안에 들어가니 일본의 중견 배우인 나기라 켄이치가 먼저 와 맥주를 들이키며 반긴다.

주인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만화가와 배우는 몇 순배의 맥주를 마신 후 일본 소주로 주종을 바꿔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때, 나기라 켄이치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술은 말이죠. 마시는 게 아니에요. 즐기는 거예요.”, 벌건 얼굴의 만화가, 쿠스미 마사유키가 맞장구를 친다. “아, 좋은 말이네요.” 나기라씨가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까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 그러지 말라고 사람들이 비난하는데, 이건 그냥 즐기는 거예요. 거 뭐냐, 꽃꽂이나 다도나, 다 같은 거예요. 그냥 즐기는 거죠. 일종의 주도니까요. 그럼, 주도의 소양을 닦기 위해, 한 잔 더 즐겨볼까.” 불콰해진 얼굴의 배우가 주인장을 부르며 메뉴판을 살핀다.

순전히 이 두 사람의 대화 때문에 이 에피소드를 좋아한다. 댁들이 인생의 행복을 위해 꽃꽂이, 다도에 심취하는 것처럼, 나 또한 같은 이유로 술을 마신다는, 당당하면서도 약간은 냉소적인 나기라 켄이치의 말에 박수를 쳤다. 그러나 더 맘에 들었던 건 따로 있다. 활동 분야도, 나이도 다른 두 중년 남자가 한가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정겹게 술을 마신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식당 안을 가득채운, 무리지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가득한 풍경이었다. 나기라 켄이치가 주도에 대해 다 하지 못한 말이 두 사람의 투 샷과 이 소란스러운 풀 샷에 담겨 있다. 주도(酒道)는 혼자서 소양을 닦아서는 그 이치를 터득할 수도, 득도도 할 수 없는 도(道)라는 것.

영화 "어나더 라운드(Druk, Another Round, 2020)" 스틸컷.
영화 "어나더 라운드(Druk, Another Round, 2020)" 스틸컷.

트렌드에 역행하고 싶은 것


영화 속 네 남자는 결국 술을 끊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새로 배워야 했을 것이다. 취하지 않고도 뜨거워지는 법, 열정을 깨우는 법, 몸과 마음을 이완하고 느긋해지는 법, 대화를 많이 하는 법, 그리고 속내를 터놓는 법 등을 말이다. 새로운 음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런 배움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우리 또한 새로운 배움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다. 한 잔 더(Another round) 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원제(Druk, 영어로 Drunk, 폭음이다.)처럼 폭음을 하고 잔 뒤, 푸석해진 얼굴과 텁텁한 입 안 때문에 후회하던 아침도 조만간 최후를 맞이할 것 같다. 이제는 좋아하는 IPA 맥주 한 잔을 공들여 마시거나 맑은 전통주 한 병을 마시며 그 향기와 복잡한 맛의 굽이를 따라가 볼 때가 된 듯하다. 술을 마시면 취하는 것이 당연하고, 술을 마시면 되도록 많이 마시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술 잔 앞에 좋은 사람이 있고 한 잔의 술을 넘기기 전 더 많은 대화가 오가는 것이 한 잔 술을 위한 미학임을 받아들일 나이가 된 듯하다.

이렇게 가벼운 술자리의 트렌드는 받아들이겠지만, 혼술의 트렌드는 역행해보려 한다. 술잔 앞에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속 친구들이 그 희한한 프로젝트를 함께 했듯이, 쿠스미 마사유키와 나기라 켄이치가 어울려 취했듯이, 그렇게 단 한 잔의 술이라도 좋은 사람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 술기운이 내 말문과 마음의 문을 열기 전에 그저 스르륵 내 말문과 마음 문을 열어줄 누군가와 마주하여 남은 가을을 잔에 담아 오랫동안 마셨으면 좋겠다. 이런 술자리라면, 주도의 산실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