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스틸이미지.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스틸이미지.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은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다. 타이핑 하는 이 순간에도 “잊혀진”에는 빨간 줄이 그어졌다. 틀린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잊다”라는 동사에 두 번의 일을 시킨 꼴이기 때문이다. “잊다”의 피동사(被動詞)는 “잊히다”로 충분하나 거기에 같은 목적을 가진 “~여지다.”가 불필요하게 엉겨 붙어 있다는 것이다. 자, 이쯤해서 문법의 규칙은 잊자. 대신 다른 생각을 해보자.

“잊다”에게 일을 시킬 순 있을까?


생각을 펼치기 전, 우선 피동사와 “잊다”의 의미를 정리하고 넘어가자. 피동사의 한자 피(被)는 피해(被害)나 피살(被殺)에 쓰이는 한자다. 아울러 피복(被服)이라는 말에도 쓰인다. 얼핏 두 쓰임새가 달라 보이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뭔가 덮어 씌워진다는 맥락에선 그 쓰임새가 같다. 피복이라는 말에는 인간이라면, 그 구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갖춰야만 하는 필수품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의복하고는 그 뉘앙스가 다르다.

“잊다”라는 동사 앞에는 물건이나 사건, 또는 그에 관한 기억이 명사로 나온다. 당연히 과거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 프로이트가 <쾌락 원리 저 너머>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좋은 과거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잊고 싶은” 과거의 기억도 강박적으로 생각해 내어 자신을 괴롭힌다. 그 괴로움의 해결을 위해 동사 “잊다”에게 일을 시켜 안 좋은 기억만 쏙 골라내어 잊히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야만, “잊다”의 피동사형 “잊히다.”는 현실에서도 그 구실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 이미지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 이미지

 

'선택적 잊음'의 가능성


<이터널 선샤인>은 이런 선택적 “잊음”의 가능성에 대해 묻는 영화다. 끝난 사랑의 잔해 속에서 버리고 싶은 것만 골라내어 버릴 수 있는지 묻는 영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숫기 없는 남자가 활달한 여자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다름에 끌려 사랑에 빠졌고, 그 다름으로 인해 상상도 할 수 없던 사랑을 했으며, 그 다름 때문에 헤어졌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사랑을 했기에, 그 사랑엔 혼자서는 만들 수 없었던 추억들이 가득 저장되어 있다.

인생이 그러하듯, 사랑 또한 좋은 날, 좋은 일, 좋은 기억만 있을 순 없다. 싸운 기억도 있고 화낸 기억도 있다. 실망한 기억도, 좌절한 기억도 있다. 남자는 사랑이 선사한 좋은 기억 때문에도, 나쁜 기억 때문에도 괴롭다. 당연한 거 아닌가? 좋으면 다시는 그럴 수 없어서, 나쁘면 되돌아가 고칠 수 없어서 괴롭지 않겠는가? 결국 남자는 원하는 기억을 새치 뽑아 주듯이 뽑아 준다는 수상쩍은 연구소를 찾는다. 남자는 연구소가 시키는 대로 사랑의 모든 물리적 흔적을 공들여 챙겨 던져준다.

작업이 시작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앞서 말했듯, 끝난 사랑엔 좋은 추억도 있다.

지우고 싶었던 어떤 기억은 세월이 지나 생각해보면 꼭 나쁘지만은 않은 기억임을 알게 되어 좋은 추억의 서랍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게다가 기억은 잃는 것이 아니라 잊는 것이다. 잘 챙겨둔 소중한 물건을 어디다 뒀는지 잊었다고 해서 그 물건이 분실됐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영화 <드림 캐처>와 <인사이드 아웃>의 서랍과 구슬의 은유처럼 그것들은 우리의 기억 속 어딘가에 잘 저장되어 있다. 그 결과, 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기억은 잊을 순 있어도 잃을 순 없다. 지난 사랑의 기억이 담긴 서랍을 뒤엎어 사랑의 흔적들을 뿔뿔이 흩어 놓을 순 있어도 그것 자체는 소멸시키지 못한다.

물보라에 속는 시간


올 봄, 일본 가다랑어 선단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조업 방법은 간단했다. 우선 선단의 베테랑 선원이 육안과 쌍안경으로 새 떼를 찾는다. 수면 위에 갈매기 같은 바닷새가 모여 있다면, 작은 물고기가 수면 아래 있는 것이고, 그 작은 물고기들은 큰 물고기 떼에 쫓겨 올라온 것이기 때문이다. 새 떼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리면 선장은 어군 탐지기로 가다랑어 무리의 규모를 확인한다. 이 후 그 떼의 한가운데 배를 몰아넣고 배 양쪽으로 낚시대를 든 선원들이 자리를 잡는다. 그 뒤, 수면을 향해 물을 분사한다. 인공적인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가다랑어는 그 물보라가 정어리 같은 잡어 떼의 소란한 움직임이라 여겨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때, 낚이게 된다. 이 거짓 물보라에 속는 시간은 단 15분에 불과하다. 선원들은 15분 안에 전투 같은 낚시를 한다.

고통스러운 사랑의 기억이 있다면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상처를 줬던 사람과 닮은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린 상처를 준 사람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거나 결혼하는 실수를 반복한다. 그뿐인가? 상처를 안긴 연인과 다시 만나기도 하고, 이혼했던 사람과 재결합하기도 한다. 사랑에 속으면서도 사랑에 돌아가고,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던 맹세의 말이 무색하게 다시 사랑에 빠진다. 물보라에 속아 낚이다가 15분이 지나서야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채는 가다랑어와 비슷한 걸까? 그건 아니다.

무모한 사랑, 그 동어반복


헤이즈가 노래했듯이 사랑이 끝나면 더 많이 사랑한 쪽이 더 아프다. 나태주 시인의 <너에게 감사>라는 시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 단연코 약자라는 비밀”이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사랑에 목숨 거는 이의 사랑을, 사랑할 때마다 기꺼이 약자를 자처하는 이의 사랑을 우린 무모하다고 한다. 그러나 무모한 사랑은 동어반복이다.

사랑은 애초에 무모한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그 아픈 기억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무모하다. 처음 사랑이든, 두 번째 사랑이든, 열 번째 사랑이든 다 무모한 사랑이다. 애초에 사랑은 실패한 가능성을, 사랑에 또 상처받을 위험의 가능성이라는 섶을 품고 타자의 마음 속 불로 뛰어드는 것이다. 결국, 무모한 사람만이 제대로 사랑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더 많이 지는 사람이/ 끝내 승자라는 비밀”이라고 이어 썼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운명을 향해


<생각의 속임수>에서 권택영 교수는 “기억은 사랑이다. 누가 더 많이 사랑했는지 알아보려면 누가 더 자세히 더 많이 기억하는가를 알아보면 된다.”고 했다. 그렇다. 인간과 가다랑어와 다른 점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는 뇌의 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도 속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임의 심해에서 박차고 올라와 이번 사랑은 진짜 운명적 사랑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그 사랑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에 있다.

사랑이 두려워 자기만의 심해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사랑에 낚이지 않을 순 있어도, 사랑만이 일으킬 수 있는 그 찬란한 물보라를 만날 수 없다. 무모(無謀)가 말 그대로 꾀와 계략과 살펴가는 조심스러움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그 모(謨)를 할 수 없는 이가 그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그러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직 사람만이 그럴 수 있다. 운명에 맡긴 채 사랑에 몸을 던지는 건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모든 모험가와 탐험가가 그러하듯 사랑에도 은퇴가 있을까? 마음은 있지만 할 수 없는 때가 올까? 그렇다면 더욱 지금 무모한 사랑을 하기 좋은 때인지 모른다. 그 무모한 사랑에서 은퇴한 사람만이 사랑을 부추기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사랑할 여력이 남아 있는 청춘이라면, 올 한 해 사랑을 만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물론 아플지도 모르겠지만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니까 사랑이고, 그 아픔을 견뎌낼 수 있으니까 청춘 아닐까? 무책임하게 사랑을 부추기고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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