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수 기자 @이코노미톡뉴스] 고대와 연대는 좋은 라이벌 사이로 서로가 필요로 하는 파트너 관계이다. 다만 연대 캠퍼스와 이웃하는 이대생들의 일방적인 친연대 행태가 문제를 일으켰다.

매년 정기 고연전은 동대문의 서울운동장에서 펼쳐져 본게임 못지않게 응원전이 요란했다. 양 대학 간 응원전 경쟁이 너무 강렬하여 중간에 이대와 숙대 등 여대생 응원팀을 완충역으로 배치했다. 

그러나 고대 농구팀이 연대에 크게 밀리고 있을 때 이대생들이 패색이 짙은 고대 팀에게는 야유를 보내고 연대 팀에게는 무한 열렬 함성을 보내니 분노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고연전 응원단의 모습(1977년 9월 24일). (사진=국가기록원)
고연전 응원단의 모습(1977년 9월 24일). (사진=국가기록원)

 

관람석 바닥에 준비되어 있는 깔판을 폭탄처럼 이대생 쪽으로 집어던지자 울음 섞인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연대 응원팀이 나서자 고대 팀이 응전하여 삽시간에 ‘장외 고연전’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에 당시 최강의 기마 경찰이 출동했으니 큰 사건에 속했다.
4·19 학생혁명 이후 대학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듯 한국일보가 새 신문소설로 정비석 작가의 『혁명전야』를 연재한다고 예고했다. 

대체로 독자들은 학생시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였기에 4·19 이후 대학 스토리를 재미있게 엮을 것으로 기대했다.

연재 첫날, 돈 1000원이 생기면 서울대생은 공부하기 위해 노트를 사고, 연대생들은 ‘신사 매너’로 구두를 깨끗이 닦지만 고대생은 막걸리를 마신다고 비교한 요지였다. 비록 고대가 ‘막걸리 대학’으로 불렸지만 다소 불쾌했다. 이에 왈가닥 학우들이 앞장서서 ‘나가자’고 하길래 중학동 한국일보사 앞으로 가니 연대생들이 먼저 와 흥분하고 있었다.

결국 한국일보가 연재 중단을 발표하고 작가 정비석도 사과함으로써 일단락 지었다. 반면에 우리네는 ‘반 이대’ 감정이 남아 있어 “이번 기회에 이대생들과는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어 자녀들 혼사가 생겼을 때 보니 대다수 학우들이 이대생 출신과 결혼하고 일부는 숙대생 부인을 두고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때 그 시절의 ‘반 이대’ 감정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촌 묘역 잔디광장의 ‘갑론을박’


거의 60년 전 일이지만 시골서 올라와 하숙이나 자취생활 하다 보면 빨래 문제가 걱정이었다. 요즘처럼 세탁기가 보급되기도 전에 시커먼 세탁비누 한 장 구하기도 쉽지 않은 세월이라 1주일 내내 러닝셔츠와 팬티, 양말 등 빨랫감을 신문지에 싸서 날짜를 꼽고 있을 때였다.

매 주말 칠판 구석에 ‘걸레 팀’이란 이름으로 빨래팀 모집 안내가 나온다. 홍릉 계곡에서 빨랫감을 빨아 나뭇가지에 걸어 말려 돌아오는 행사였다. 반면에 가정교사 집이나 하숙집에서 몰래 빨아 문턱에 걸어 놨다가 “이 냄새 나는 빨래 누구 것이냐”는 주인집 호통을 듣기보다 얼마나 떳떳한 일이던가.

대학 시절 동향 출신 모임보다 서울 출신들이 안내하는 여대생들과 미팅이 흥미로웠다. 당시 과수원과 보리밭, 배추밭 천지이던 강남 봉은사 앞 미팅을 가면서 한강 나룻배 위에서 추첨으로 파트너를 결정, 하루를 보낸 후 각자 다음 약속을 하게 되어 있었다. 주로 광화문의 여왕봉, 초원, 무과수다방 등에서 만나 개봉 극장 (국제)프로를 구경한다는 스케줄이었다.

5.16 군사혁명 이후 다방 내부 모습(1961년 7월). (사진=국가기록원)
5.16 군사혁명 이후 다방 내부 모습(1961년 7월). (사진=국가기록원)

 

평소 청량리 역전, 신설동 등 재개봉, 재재개봉 극장서 동시상영을 구경하던 처지에 모처럼 개봉 극장을 관람하자면 커피값, 극장값, 냉면값 등을 계산하여 돈을 빌려야만 한다. 그런데도 막상 현장에 나갔을 때 파트너가 친구를 동반하고 나오면 갑자기 배탈이 났노라고 위장하고 판을 깰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학 4년간 요즘 세대 같은 데이트 한 번 못해 본 것이 참으로 아쉬운 옛 이야기다.

봉은사(1975년 12월 4일). (사진=국가기록원)
봉은사(1975년 12월 4일). (사진=국가기록원)

당시 학생 형편에 신문을 구독할 형편이 못됐지만 가는 곳마다 신문이 있으면 열심히 읽었다. 교수님들도 조간신문 뉴스와 관련한 논쟁을 하고 학생들과 토론도 즐겼다. 
캠퍼스 본관 뒤편에 인촌(仁村) 김성수 묘소의 잔디광장이 좋은 토론장이었다. 지금은 묘소를 이장하여 인촌 기념관 건물이 들어섰지만 당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묘소 잔디는 너무나 포근하여 항상 여러 팀이 차지했다.

미국 프로복싱 천재 알리와 조지 포먼 대결, 흰둥이 토니 커티스와 검둥이 시드니 포이티어의 ‘흑백의 대결’을 두고 논쟁했다. 국산 영화로는 김진규, 최은희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과 ‘춘향전’의 최은희와 김지미를 두고 갑론을박도 했다.

정치 관련 논란은 한도 끝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에 대한 비판 일색이었다. 장면, 신익희, 조병옥에 대한 찬반논란, 죽산 조봉암 토론도 극렬했다. 4·18로 4·19 혁명을 이끌어낸 고대생 자부심이 넘쳤었다. 그렇지만 지금 오랜 세월이 지나 보니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선견지명과 탁월한 애국정신 등이 너무나 위대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박사가 해외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민주주의론 체험하고 건국 대통령으로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길로 이끈 것이 얼마나 위대한 선택이었느냐는 말이다.

대학생 시절이 어려웠지만 지금 다시 돌아보면 얼마나 뭉클하고 아쉽고 아름다운 꿈의 시간이었던가.(배병휴 기자 회고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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