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먹는 걸로 끝나는 방송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게임이 주 콘텐츠인 <1박 2일>과 <런닝맨>, <놀라운 토요일>과 <지구오락실> 같은 프로그램을 제외한 대부분의 방송 예능 프로그램들은 칼럼 제목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코로나 시국에 잠시 다른 방향을 모색하나 싶더니만 다시 “여행하고, 놀다가 결국엔 먹는” 프로그램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역사를 다루는 <역사 저널 그날>이나 <벌거벗은 세계사>, 미술과 아티스트가 주인공인 <노머니 노아트>, 스포츠가 소재인 <최강야구>와 <뭉쳐야 찬다.>와 같은 프로그램은 시청률과 흥행 여부를 떠나 주제와 소재의 희소성 때문에 그 가치가 독보일 정도다.

물론 미식이나 요리 관련 프로그램은 예전부터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영국의 유명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가 초짜 요리사일 때 나왔던 Naked Chef가 한국에서 방송된 것이 벌써 이십여 년 전이었다. 고든 램지가 풋내기들을 윽박지르는 요리 예능도 꽤 오래전에 나왔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요리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냉장고를 부탁해>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음식이 예능의 중심이 되기 시작한 건 먹방이 전성기를 누리면서부터였다.

'원나잇푸드트립:원픽로드' 공식영상 스틸컷.
'원나잇푸드트립:원픽로드' 공식영상 스틸컷.

 

예를 들어 <맛있는 녀석들> 같은 프로그램은 미식과 대식의 접점이다. 한 덩치 하는 개그맨들이 밥을 먹으러 다니면서 엄청난 양의 다양한 음식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먹는 방송은 의외로 인기를 끌었다. 또 가까운 해외 여행지에서 쉬지 않고 먹으면서 도장 찍기 시합을 하는 프로그램인 <원 나잇 푸드 트립>은 많은 여행자들의 아쉬움을 대신 해소해 주면서 제법 인기가 있었다. 여행지에서 돌아올 때마다 들곤 했던 ‘그걸 먹고 왔어야 하는데.’하는 아쉬움을 호스트가 대신 해소해 준 것이다.

먹방의 전성기


먹방 콘텐츠의 전성기는 유튜브가 열었다. 이 전성기의 주역인 먹방 크리에이터들에겐 먹는 것 자체가 콘텐츠다. 게임도 하지 않고 먹을 걸 앞에 두고 친구랑 옥신각신하지도, 먹는 방법을 논쟁하지도 않는다. 그저 먹는다. 많이, 특이하게, 혼자서, 그러나 가끔은 초대 손님과 함께. 여기서 많다는 것은 종류와 양, 모두를 가리킨다. 이들은 그 많음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고 질리게 한다. 보통 사람은, 심지어 개그맨 김준현 같은 대식가라도 엄두를 못 낼 양을 먹는다. 여기에 메뉴도 다채롭다. 시청자가 야식으로 족발과 치킨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이들은 그 두 개를 받고 그 위에 탕수육을 얹는다. 우리가 고민하는 두 지점, 즉 양과 종류의 선택이라는 고민을 이들은 가볍게 무시함으로 인해 일반인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 넘어섬 자체가 볼거리다.

이런 먹방이 방송으로 넘어와 여행 프로그램과 협업하기 시작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우리나라 저녁 정보 프로그램의 콘텐츠의 절반 이상은 여행지 소개와 음식과 맛 집 소개였고 지금도 그렇다. 예능 프로그램은 그 두 개를 섞었을 뿐이다. 혼자 사는 연예인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 오랜만에 만난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에서도 여행 가서 먹거나, 먹으면서 여행하거나, 여행 중에 먹는 걸 보여주는 데 긴 시간을 할애한다. 혼자 캠핑을 가도 먹고, 친구를 만나도 먹고, 해외여행을 가도 국내 여행을 가도 먹는다. 여행과 먹는 것의 협업은 이제 낯선 곳에서 살아보기와 요리 콘텐츠와 요리 인증 사진의 유행에 힘입어 낯선 곳에서 살면서 밥 해 먹기 프로그램으로 변종 진화 됐다.

여행의 새로운 의미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가 떠올랐다. <꽃보다 할배>에서 박근형 선생님이 대성당의 엄숙함과 고요를 만끽했던 장면이 신선하게 다가왔던 건, 이순재 선생님과 신구 선생님이 영화 <페드라>와 그 여주인공인 그리스 출신 여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의 배우로서의 삶과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물 흐르듯 술술 풀어내는 걸 보면서 작은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윤여정 선생님과 김자옥 선생님, 그리고 김희애 씨와 이미연 씨가 크로아티아의 멋진 풍경 앞에서 소녀처럼 감탄하고 서투른 이승기를 다독이며 여행하는 모습이 신선하게 와닿았던 기억도 났다.

영화 '페드라(Phaedra. 1967) 스틸컷.
영화 '페드라(Phaedra. 1967) 스틸컷.

 

그분들도, 가이드 이서진과 이승기, 나영석 PD와 스태프들도 저녁엔 먹고 마셨지만 그것은 끼니에 불과했다. 그러니 길게 담을 필요도, 그 과정을 찬찬히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그 콘텐츠는 인생과 직업에서 수많은 경험을 쌓고 깊은 내공이 생긴 사람이 낯선 나라와 도시, 그리고 풍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 해석을 위해선 어떤 지식과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줬다. 급하게 관광지를 도는 데 급급하지 말고 하나의 공간과 풍경을 오래 음미하라고 가르쳐줬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당연하지 않고 아무리 오랜 세월 함께 했어도 여전히 함께 할 새로운 경험이 있으며 그 경험은 인생의 소중한 추억이 된다고 가르쳐줬다.

배우지 못하고 지나쳐 온 것들


올 2월, 아이 생일을 맞아 경주에 갔었다. 부산과 가까운 곳이고 아이 교육적인 면에서도 좋은 곳이어서 종종 가곤 한다. 그렇게 몇 번을 갔어도 그 유명하다는 황리단길을 가본 적이 없어서 두 여자를 앞세워 따라갔다. 내게 그곳은 커다란 잡화점 같았다. 일본의 동키호테 잡화점이 생각날 정도였다. 카페와 빵집, 술집과 식당, 잡다하고 자질구레한 소품들을 파는 상점, 한복을 대여해 주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 많은 점포 중에서 서점은 <어서어서 서점> 한 곳뿐이고, 검색을 해보니 갤러리 같은 문화 예술 공간은 <갤러리 란> 정도다. 그렇게 이곳도 전주 한옥마을의 전철을 밟고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도 변했다는데 어째 우리의 여행과 먹고 노는 방법이, 그 본질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박정희 정권이 관광사업진흥법을 만든 것은 1961년이고, 지리산 국립공원이 지정된 건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관광단지인 경주보문관광단지가 개발된 건 1979년이다. 충무김밥과 같은 지역의 유명 음식과 맛집이 전국구로 부상하게 된 <국풍 81>이 열린 것도 벌써 40여 년 전 이야기고,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지 30년이 좀 넘었다. 우린 그동안 열심히 여행을 다니며 먹고 마셨다. 70년대부터 그래왔다면 이제 벌써 50년을 그렇게 해 온 것이고 80년대부터 그래 왔다면 40년을 그리 해 온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앞서 말했듯이 저녁 정보 프로그램의 절반 이상은 사실 여행지와 음식 소개에 치중한다.

어쩌면 우리는 과도 성장기에 이것 외에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학습 받을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가 시간에, 친구와 만나면, 낯선 여행지나 휴양지에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배울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좀 다르게 할 때도 됐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해외여행을 세월을 사람의 나이로 환산하면 원숙한 4,50대가 된 것이니 말이다. 인생의 말년에 마주한 낯선 풍경 앞에서 경외감을 고스란히 보여줬던 전설의 배우들의 여행을 떠올려 보자. 우리도 그렇게 여행을 할 때가 됐다. 맛집에 줄 서서 한 자리 겨우 차지한 후 부리나케 먹고 다시 관광지를 순회하는 관광 대신 천천히 차오르는 감동을 말없이 곱씹을 때가 됐다. 이제 방송에서도 그런 여행을 보여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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