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본 신세계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우연히 탈북민 이유미씨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다양한 탈북민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 영상의 구성은 단출하다. 나오는 사람은 이유미씨와 다른 탈북민 한 명이 전부다. 카메라 앵글도 두 사람을 한 화면에 잡는 투 샷이 대부분이다.

이야기 내용 또한 비슷하다. 고향과 갖고 있던 직업, 신분에 따라 이야기의 출발점은 조금 다르지만 탈북 과정과 그 이후 이야기는 대체로 비슷하다. 인천공항에서의 문화충격, 인천대교의 위용, 서울의 야경, 국정원과 하나원에서의 경험, 새로운 아파트에서 받은 감동, 한국 사회에서 적응해가는 과정 등이 주 내용이다. 그런데 묘하게 재미가 있어 영상을 몇 개 보다보니 이유미씨와 탈북민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바로 신세계다.

유튜브 채널 '중고차는 유미카'

 

그들에게 한국은 신세계였다. 물론 내가 발을 디딘 이곳이 신세계라고 절감한 순간은 저마다 달랐다. 앞서 말했듯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기 직전 보이는 인천과 서울의 야경에서부터 신세계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 전에 대한민국 국적기에 오르면서부터 신세계에 왔음을 실감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인천공항의 깔끔함과 웅장함에서 느끼는 사람도 있고, 국정원으로 가는 고급 버스 안에서 느꼈다는 사람, 국정원에서 처음 먹은 식사에서 느꼈다는 사람, 도심의 야경과 도로를 꽉 메운 자동차에서 느꼈다는 사람, 얇고 큰 TV와 같은 다양한 가전제품, KTX에서 느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이어서 하는 말이 있었다. 이 세계를 몰라서, 지금 자신들이 사는 세계가 최고라고 믿고 사는 북한 주민들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는 것이다.

세 종류의 '신세계'


신세계는 이렇게 그 세계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낯선 세계를 처음 경험했을 때도 도래하지만 낯선 경험을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내게 없어 그 경험이 신비와 무지의 영역으로 남을 때 신세계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 기술을 모르는 사람에겐 신세계지만 신기술과 기존 기술의 새로운 적용을 잘 아는 사람에겐 그야말로 전혀 신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필자는 후자의 신세계를 경험했었다. 얼마 전 딸이 구립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했다. 이를 위해 셀프 대출 반납기에 다가가 화면 설명을 보니 다섯 권 전체를 올려놓으라고 했다. 올려놓자 다섯 권의 제목과 ISBN이 주루룩 떴다. 바코드를 읽은 것도 아니고 책등을 읽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한 걸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딸과 한참 토론했다. 결국 우리끼리는 답이 안 나와서 IT 업계에 일하는 삼촌에게 나중에 물어보자고 했다. 마침 주말에 처남과 한 잔하는 자리에서 물어 봤다. 처남이 약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거 얇은 칩을 넣어놓은 거예요. 도난 방지용 칩 같은 거요.”

(사진=이톡뉴스)
(사진=이톡뉴스)

정리해 보자. 최근 난 두 종류의 신세계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 탈북민이 두 세계의 격차로 인해 체감한 신세계와 필자가 도서관 대출 반납 기기에서 경험한 신세계다. 전자는 전혀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통해 만나는 신세계, 후자는 기술의 진보와 응용으로 마주친 신세계다. 여기에 또 하나의 신세계를 추가할 수 있다. 바로 점진적인 발전 끝에 마주한 오늘의 세계를 과거의 세계와 비교했을 때 체감되는 신세계다. 과거에 비하면, 그렇다, 지금 이 세계는 신세계다. 매연 기관 자동차보다 전기 자동차가 더 눈에 많이 띄는 시대다. 자동차 소리가 너무 작아서 시야 밖에서 오는 자동차를 인지 못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아이한테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자동차와 함께 가는 이면도로를 걸을 때 좌우를 잘 살피라고 가르치는 신세계다. 스마트 폰을 보다가 횡단보도 신호를 놓치는 보행자가 너무 많아서 바닥에 스마트 신호등까지 설치 된 신세계다.

신세계의 이편과 저편의 화해


세 종류의 신세계를 생각하면서, 특히 탈북민의 탈북과정과 한국 정착기를 보면서 신세계를 함께 사는 두 존재의 공존에 대해 생각했다. 구세계부터 현재의 신세계까지 살아내고 있는 사람과 신세계에 태어나서 이 세계의 신비와 새로움을 당연하게 여기는 소위 신세대, 또는 요즘 말로 하면 MZ 세대와의 공존과 소통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의 세계와 지금의 세계는 각각 구세계와 신세계다. 탈북민처럼 저 세계와 이 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두 세계를 잇고 있는 시간의 끈을 도려낸 뒤, 어린 시절의 한 시점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계가 신세계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린 여기서 지금 이 시대의 “신세계적 현상”을 “현세계의 당연한 일상”으로 여기며 사는 이들과의 소통 가능성을 만들, 또는 그것의 불가능성, 또는 어려움을 해결한 열쇠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대조군의 존재 여부다. 나이든 세대가 소위 “라떼” 운운하는 것은 현재와 비교할 수 있는, 대조군이 되는 과거의 세계, 즉 구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금의 젊은 세대가 그 “라떼”의 담론을 이해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이 세계와 비교할 대조군이 없기 때문이고 말이다.

그렇다. 젊은 세대, 통칭 MZ 세대에겐 구세계가 없고, 나이든 세대와 같은 점증적인 발전을 거친 시간과 현장이 부재하다. 살아낸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과거 또한 짧다. 과거가 짧다는 것은 한 개인의 역사가 짧다는 것이고 그것은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세계, 구세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많지 않다는 의미다. 반면 살아낸 시간이 많다는 것은 변화와 진화와 혁명의 목격자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 사회는 그 변화와 진화와 혁명의 주기가 점점 짧아졌기에 더 많이, 더 자주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때마다 과거의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학습하고 적응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때마다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세계에 몸을 던져 왔다는 이야기다.

그들 앞엔 '신세계'가 있다


그것은 모든 도전이 그러하듯 두려움을 동반한 도전이었을 것이고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도전이었을 것이다. 도전 끝에 쟁취한 변화 된 새로운 자신으로 새로운 신세계를 살아냈을 것이다. 그 변화와 진화와 혁명의 파도는 또 온다. 그때마다 다시 나를 버려야한다. 이 파도가 우리가 사는 동안 끊임없이 밀려온다는 걸 안다면 우린 서로를 관용하고, 어쩌면 연민어린 마음으로 마주봐야 할지도 모른다.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Coco, 2018)" 스틸컷.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Coco, 2018)" 스틸컷.

 

젊은이들은 나이든 사람이 수많은 신세계를 거쳐 이 세계에 도착했음을, 그 거쳐 온 세계마다 과거의 자기를 버려두고 왔음을, 그 버림의 순간마다 엄청난 두려움이 함께 했음을 기억해줘야 할 것이다. 나이든 사람들은 우리는 미처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신세계가 젊은이들의 미래에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물론이고 그들조차 어떻게 변화하고 적응하고 살아내야 할 지 엄두가 안 날 낯선 신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보다 더 빠른 주기로, 더 큰 변화의 진폭을 가진 신세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그래서 그 세계를 살아내기 위해선 우리가 적응하고 학습하고 도전하고 노력해야 했던 것 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함을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마치 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우주 비행사를 격려하는 지상의 사람들처럼 젊은이들의 여정에 신의 가호와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갖고 서로를 대한다면, 이렇게 서로의 지나온 시간과 세계를, 가야할 시간과 헤쳐나 갈 미지의 세계를, 그 각자의 시간과 살아내고 살아갈 세계의 무게를 인정한다면, 함께 살아가는 오늘의 신세계를 함께 헤쳐 나가야할 동반자로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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