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와 정치의 본질을 묻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요즘처럼 정치 뉴스를 안 본적이 없다. 이 당도 싫고 저 당도 싫은 나 같은 사람을 정치적 개인주의라고들 하는 데,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 정치 뉴스만 보면 짜증이 난다.

야당이든 여당이든 일은 안하고 맨 날 싸움만 하는 것 같다. 군소 정당들은 게으른 사장이 운영하는 식당 같다. 간판은 그대로 있고 밤이면 불도 켜는데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거나 모처럼 열려 있어서 들어가 보면 주인이 없다. 이래서야 어디 영업을 하는지 안하는지 알 수가 있겠나. 장사를 할 거면 제대로 화끈하게 하고 문을 닫을 거면 확실히 셔터를 내리든가 하지, 이도 저도 아니니 손님 입장에선 성의가 없어 보인다. 이런 한국 정치판에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엄청난 딜레마의 답을 찾기 위해 격론을 펼치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나오는 영화가 생각났다.

이 영화는 테러가 가진 태생적 딜레마를 묻는 영화다. 더 나아가 정치와 정치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묻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한명의 테러리스트를 세 국가-영국, 미국, 케냐-의 정보국이 쫓는다. 그러다 케냐에서 한 여성 테러리스트가 발견되고 미군은 드론을 띄워 그녀를 쫓는다. 그녀는 한 가정집에 들어간다. 딱정벌레만한 소형 드론으로 집 내부를 보니 국제 테러범 지명 수배자 1순위, 4순위, 5순위가 모여 있다. 이들은 방탄조끼를 이용한 자살폭탄테러를 준비하고 있다. 폭탄 조끼도 준비됐고, 입을 사람도 준비됐다. 선전 영상을 찍은 후, 테러단체 리더의 격려까지 받고 있다.

테러가 임박했음이 감지되자 작전은 생포 작전에서 살상 작전으로 변경된다. 이 과정에서 법리 다툼이 일어난다. 영국 군대 법무관이 호출 되고, 런던에 있는 상황실에 모인 내각 관료와 정치인들은 법무장관을 중심으로 법리다툼을 한다. 그 와중에 장군은 법무장관에게 결정을 묻고, 법무장관은 다시 다른 나라에 나가 있는 외무장관에 묻는다. 외무장관은 다시 총리에게 묻는다. 심지어 이들은 미국의 국무장관에게까지 의견을 묻는다. 얼핏 보면 신중해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도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드론의 폭격이 허락된다. 그러나 테러범이 모여 있는 집의 뒷집에 사는 소녀가 빵집을 하는 엄마가 내 준 빵을 팔러 테러범 집의 담장 밑에 좌판을 깐다. 다시 법리 공방과 명분 싸움이 시작된다.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Eye in the Sky, 2016)" 스틸컷.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Eye in the Sky, 2016)" 스틸컷.

 

딜레마의 그물


쉴 새 없이 딜레마가 이어진다. 첫 번째 딜레마는 이렇다. 저들의 조끼 형태의 폭탄 크기를 보면 자살폭탄 테러가 성공할 경우 그 피해 규모는 사상자 80명 정도로 예측된다. 반면 지금 테러범의 은신처를 폭격하면 빵집 소녀가 중상 내지는 사망할 것이 확실하다. 이들의 첫 번째 딜레마다. 예측되는 80명의 피해자를 위해 확실한 피해자인 소녀를 희생시켜도 되는가. 이것이 정치적, 윤리적으로 옳은가를 묻는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케냐 현지 요원이 소녀가 좌판에 깔아놓은 빵을 다 사려고 한다. 그러나 그 지역을 관할하는 반군에게 요원이 발각되어 도망치게 되고 소녀는 그 소란 이후 다시 빵을 정리해 좌판을 벌린다. 논란은 지속 된다.

이 지점에서 묘한 대사가 나온다. 이게 두 번째 딜레마다. 80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키리라 예측되는 테러를 막기 위해 테러범을 죽이면서 아프리카의 우방국인 케냐의 소녀도 함께 죽이는 것과, 우방국 한 소녀를 살리는 대신 예측되는 80명의 내국인 테러 피해자를 방관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정치적으로 이득이 되는가를 묻는다. 프로파간다를 하기에, 즉 선전 선동을 하기에 무엇이 더 좋은지 묻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의 감독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 부분에 담겨 있다. 이 질문을 통해 한 생명의 소중함이 아니라 테러와 정치의 역학 관계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테러는 테러 이후의 혼란과 공포 생산을 목적으로 한다. 테러 사건 자체보다는 그 후유증이 더 큰 목적인 것이다. 테러의 공포로 시민들의 삶을 위축 시키고 언론은 당국의 정치적 책임을 따져 묻는다. 그 과정에서 서로 비방하면서 정치권 내부적으로, 넓게는 국가적으로 분열이 된다. 그러나 영리한 지도자와 참모들, 군인과 경찰이 범인을 특정하여 그들을 국가와 국민의 공공의 적으로 호명하고 그들에 대한 복수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혼란은 일시에 해결된다. 오히려 프로파간다의 힘으로 국민은 더 단합된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테러범들의 테러는 어떤 형태로든 그들 조직으로 향하는 외부 공격을 더 강하게 해서 궁극적으로는 그들 조직을 위축시킨다. 알카에다나 IS도 그런 과정을 겪었다.

반면 테러 단체의 리더들 입장에서는 말단 테러범 세 명이 죽고 소녀까지 피살되는 것은 절대 손해가 아니다. 오히려 테러 단체와 정치적/종교적 이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분노를 폭발시켜 더 많은 테러리스트를 모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테러리스트와 그 피해국, 주로 서유럽 국가 및 미국과 같은 선진국 간의 투쟁은 다층적이다. 표면적으로는 테러라는 국제 범죄를 두고 서로 쫓고 쫓는 싸움이지만 더 중요한 투쟁은 끊임없는 프로파간다 싸움을 통해 누가 더 대의명문을 쌓아 내적인 통합을 이루고, 대내외적으로 세를 불리느냐를 두고 벌이는 경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두 번째 딜레마, 즉 테러범으로 인한 피해를 감수하고 한 소녀를 살리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영국과 미국에 이득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이 궤변이 아닌 이유다.

토머스 홉스(1669-1670년 경 사진). (화가= John Michael Wright, 출처=National Portrait Gallery(London) artwork. )
토머스 홉스(1669-1670년 경 사진). (화가= John Michael Wright, 출처=National Portrait Gallery(London) artwork. )

'정치'의 목적


다시 말하지만, 이런 딜레마들의 연쇄 속에서 이 영화가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은 정치와 정치가는 무엇을 하며,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이다. 알다시피 정치는 국가와 국민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 다스림을 통해 홉스가 말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수습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정치와 정치인에게 바라는 것은 딜레마의 해결이다. 어떤 선택을 해도 누군가, 어딘가, 언젠가 손해가 발생하고 손실이 발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 정치의 일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결국 정치인은 자신의 선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원폭투하를 결정했던 트루먼의 책상에 있었다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는 그 메모처럼 말이다.

대중이, 국민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선택을 하게 되면 그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거운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만 할 때, 그 때 정치와 정치인이 책임을 진다. 개인의 무게를 넘어서고 사회의 무게까지 지고 있으며 역사의 무게까지 체감하고 있는 존재인 정치인이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진다. 그 정치인의 선택의 옳고 그름은, 그야말로 짧게는 다음 선거가, 멀게는 역사가 판단한다. 정치인이 짊어진 무게가 공시적(共時的)이면서 통시적(通時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요즘 정치 뉴스에 많이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떠넘기기”, “책임 공방”이다. 솔직히 이해는 간다. 광고계에도 그런 말이 있다. 히트한 광고는 내가 만들었다는 사람이 백 명쯤 있지만 망한 광고에는 한 명도 없다는. 그러나 정치는 광고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일 아닌가? 이 영화에서처럼 생명과 국가의 미래를 다루는 일 아니던가? 그렇게 무거운 일이기에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정치가 책임지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일이 있다. 정치가 책임져야 될 일을 책임지면 정치 뉴스도 좀 참고 볼만해질 것이다.

(말하기 어려운 고민 또는 우울감을 느끼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으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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