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이 영화는 중의적이고 다의적이다. 영어 Whale에는 고래 외에도 여러 뜻이 있는데, 우리에게 술고래라는 표현이 있듯이 그들도 어떤 분야에 전문적이거나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그 친구 그 분야의 고래야."와 같은 표현을 쓴다. 또 거대하거나 뚱뚱한 사람에게도 이 단어를 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찰리는 이 모든 뜻에 어울리는 고래 같은 사람이다. 그는 온라인으로 글쓰기 강의를 하는 대학 강사이니 그 분야의 고래라 불러도 무방하다. 게다가 그는 고래만큼 거대하고 뚱뚱하다.

그러나 그가 진짜 고래라고 불릴 수 있고, 불려 마땅한 것은 그가 짊어진 상처와 죄책감의 무게와 부피, 그것이 만들어낸 그늘의 넓이 때문이다. 그는 사랑을 선택했기에 가족을 버린 사람이 되어 버렸고 사랑하는 이를 자살에 이르게 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후 회개와 애도를 동시에 하며 그 방법으로 폭식과 은둔을 택했다. 그 결과 육체적으로도 고래가 됐다.

영화 스틸컷.
영화 스틸컷.

 

고래를 위한 변명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들은 근본적으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다. 이타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또한 이기적인 의도와 목적이 없는 순전한 이타성은 아니다. 이타적인 선택으로 얻는 심리적 만족이 전무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심리적 만족이 전무한 선택이 없는 것처럼 피해자나 피해가 전혀 없는 선택 또한 없다. 아무도 상처 받지 않을 것 같은 선택조차 상처를 유발한다. 그 선택은 심지어 나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상실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우린 내 앞에 주어진 가능한 선택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선택하지 않아서 실현되지 못한, 다다르지 못한, 만나지 못한 미래의 나 자신이 있다. 그 가능한 나에게 주체는 상실감과 함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결국 주체의 선택은 그 선택으로 인해 상처 받았을지도 모르는 타자에 대한 윤리와 실현 가능했으나 미처 실현 되지 못한 주체 B의 무게가 동시에 실려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순전한 가해자도, 순전한 피해자도 없다. 우리의 존재와 삶 자체가 그렇다. 이 영화 속 인물들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넘나든다. 얼핏 관객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 속에서 기나긴 애도의 시간과 자기 환멸의 시간을 겪고 있는 찰리만 가해자이자 피해자라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집에 등장하는 이들 중에 죄 없는 자가 있는가? 죽은 이도, 산 자도, 아내도, 딸도, 찰리도, 어설픈 선교사와 피자 배달부도 다 죄인이다. 동시에 피해자다. 이 양면성이 찰리의 공간 안에서 위태롭게 공존한다. 마치 고래라는 단어 안에 담긴 여러 뜻처럼.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고래의 은유


“왜 모두가 죄인인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사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선택으로 인해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에게도 영향을 준다. 그 영향이 상처가 될지, 기쁨이 될지는 그 영향의 당사자만 안다. 결국 우리의 행위와 선의와 심지어 존재 자체가 악인지 선인지에 대한 판단은 타자에게 있다. 여기서 주체와 존재의 절대적 윤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찰리의 딸, 엘리의 모비딕에 관한 에세이가 말하듯, 고래를 향한 에이허브의 증오는 이런 맥락에서 슬프다. 고래는 자신의 행위가 타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자신의 행위의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존재에게 증오를 품는 것은 부질없다. 바꿔 말하면 그런 판단이 없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고래와 같은 존재, 사람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어야 할 인격과 윤리가 없는 존재다. 즉 자신의 행위가 타자의 증오와 분노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존재는, 그 존재의 물리적/정신적 부피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래와 같은 육체적 부피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죄책감과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상실감을 안고 사는 찰리는 사람다운 사람일지 모른다. 또, 그 고래와 같은 부피로 인해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한 찰리에게, 그의 찰나의 행복을 위해, 먹는 행위 외엔 행복과 자기 파멸이라는 속죄의 도구가 없는 찰리를 위해 치킨이 가득 찬 바구니와 치즈가 추가 된 미트볼 샌드위치를 포장해 온 리즈 또한 사람다운 사람일지 모른다. 상실감과 죄책감과 부채 의식을 가진 존재, 어느 누구도 따져 묻지 않았지만 스스로 짊어져야 할 타자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진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다.

용서의 가능성


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대사는 "미안해"다. 이 대사를 들을 때마다 찰리의 친구이자 간호사이며, 찰리의 연인이기도 했던 오빠를 잃은 아픔을, 그래서 상실의 아픔과 애도를 찰리와 함께하고 있는 리즈는 다시는 그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표면적으론, 미안하다는 말로는 미안한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 말을 하지 말라는 진정한 이유는 미안한 상황을 기꺼이 받아주는 사람 앞에선 그런 말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 없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미안한 상황을 함께 헤쳐 나간다. 같은 이유로 미안한 상황 속에 부재한 사람에겐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그 사람에겐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 삶과 운명을 기꺼이 나누어 짊어지는 타자에게 건네는 감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용서는 “미안해”라는 말을 들은 사람으로부터 주어진다. 신도,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사람. 그래서 구약에 나오다 시피 사죄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들은 사람은 용서를 해야만 한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만이 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람은 모두 죄인이어서 재판관의 위치에서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서로의 죄를 고백하며 서로의 죄를 서로의 눈물로 씻어줘야 한다.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은 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던 예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순결한 사람만이 심판할 수 있다면 어떤 사람도 사람을 심판할 수도 없듯이 죄 없는 사람만이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우린 우리의 죄를 벗을 길이 없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듯 서로가 서로에게 지은 죄는 연민이 담긴 서로의 눈물로만 씻어낼 수 있다. 죄 없는 이는 죄인을 안을 수 없다. 주인공은 작문 강사다. 글은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살아버린 삶은 돌아가 고칠 수 없다. 사람의 원죄-타자와 나 자신에게 지은 죄-의 기원은 여기서 발생한다. 인연이 있던 사람에게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인간만큼 죄 많은 인간이 없는 이유다.

(말하기 어려운 고민 또는 우울감을 느끼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으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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