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의 참교육 시간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NBA 2022~2023 시즌, 플레이오프에선 동부와 서부 지구 모두, 후배가 선배에게 소위 트래쉬 토크라 불리는 험한 말과 코트에서의 각종 도발, 미디어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신경전을 벌였다가 아주 호되게 혼난 적이 있다. 동부 지구에선 보스턴 셀틱스의 그랜트 윌리엄스가 마이애미 히트의 지미 버틀러에게 대들었고, 서부에선 멤피스의 딜런 브룩스가 LA 레이커스의 리빙 레전드, 르브론 제임스에게 시비를 걸었다. 결국 이 두 명의 신인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지미 버틀러는 그랜트 윌리엄스와 대놓고 일대일 상황을 만든 뒤 미들레인지 점프슛만으로 거의 묵사발을 만들어버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농구를 가르치는 것 같았다.

르브론 제임스. (사진=USA TODAY Sports=연합뉴스)
르브론 제임스. (사진=USA TODAY Sports=연합뉴스)

르브론 제임스의, 요즘 애들 말로하면, 참교육은 더 단호했다. 딜런 브룩스의 멤피스 그리즐리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LA레이커스를 만났는데, 멤피스가 2번 시드, LA가 7번 시드로, 이건 멤피스의 정규 시즌 성적이 훨씬 좋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정규 시즌 성적으로 생긴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승리에 도취되어서였는지 딜런 브룩스는 2차전 승리 후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르브론은 너무 늙었다. 마이애미나 클리블랜드 시절의 르브론을 막았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날 상대해서 40점을 넣을 때까지 존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 시리즈는 LA 레이커스가 가져갔다. 르브론 제임스는 매 게임 이십 점 이상 넣는 기복 없는 활약을 펼쳤지만 딜런 브룩스는 그야말로 말아 먹었다.

전문가에 대한 리스펙트


농구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얘기한 건 한 분야에서 일정 수준을 유지하며 오랜 시간 버텨온 이에 대한 리스펙트, 즉 존경과 존중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필자는 한 분야에서 이십 년 넘게 일하다보니 그 세월동안 업계의 변화는 물론이고 업계 사람을 대하는 고객의 태도의 변화도 체감하고 있다. 이 일을 처음 할 때만 해도 전문가가 만든 영상과 써 준 카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고객은 드물었다. 애초에 제작 전부터 수차례 회의를 하고 시안을 제시한 뒤 제작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당시의 고객들에겐 전문가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 광고든, 영화든 영상 제작은 거의 수공예에 가까운 일이어서 어느 수준 이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도제식으로 꽤 오래 교육받아야 한다는 상식이 업계 안팎으로 공유 될 때였다.

이런 분위기가 바뀐 것은 한 십여 년 전부터다. 유튜브의 열풍 속에서 크리에이터를 해보겠다고 너도나도 나서고 그 사람들을 위해 속성으로 영상 편집 프로그램과 포토샵을 가르쳐주는 학원들이 우후죽순 늘어날 즈음부터였다. 영상을 보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부쩍 늘면서 하다못해 여행 기록 영상이라도 자기 손으로 꼼지락 거리며 만들어 본 이들에게 “자기만의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높은 분들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막에 쓰인 폰트가 맘에 안 든다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폰트의 저작권이 문제가 되어서 영상 업체마다 무료 폰트를 찾아 쓰기 시작하면서 이런 의견들이 더 많아졌다. 이후엔 자막의 색, 편집의 속도에 대해서도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아마추어가 일으킨 해프닝


카피에 대해선 그래도 제법 최근까지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글쓰기에 대한 책들이 쏟아진 탓인지 가끔 글에 대해서도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우리 팀이 한 프로젝트에선 심지어 담당 주무관이 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자기 취향대로 시나리오를 각색하기도 했다. 객관적 정보를 충실히 담고 이를 바탕으로 캠페인의 이미지를 구축해나가야 하는 이번 홍보영상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두루뭉술한 말잔치만 나열했다. 게다가 문장의 종결형 어미도 “~세요.”와 “~니다.”를 혼용해서 이 영상이 개인 블로그용인지, 기관의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도 괜찮은 격을 갖춘 영상으로 만들어야하는지도 혼란스럽게 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의외로 여기저기에서 발생하고 있다. 작년 가을, 잠시 화제가 됐던 한 정당의 플랜카드 사건이 대표적이다.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혼자 살고 싶댔지 혼자 있고 싶댔나?”와 같은 문구가 정당의 플랜카드 샘플을 장식했다. 그 정당은 업체에서 그렇게 썼다고 말하며 사태를 수습했다. 당연히 업체에서 썼을 테지만 이 현수막 시안은 당원들의 의견을 묻기 위해 공식 사이트에 업로드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당 내부 관계자가 시안을 보고 소위 “컨펌”을 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런 문구는 몇 년 전 눈길을 끌었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같은 책 제목 류의, 소위 인스타 감성 문구의 차용이다. 문제는 이 차용의 적절성을 따져보질 않았다는 것이다. 심각하게 해야 될 얘기, 진지하게 할 말은 표현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자명하다. 재미만으로 정당의 말과 글이 공적인 자리와 공적인 미디어를 통해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몇몇 고객들의 선을 넘는 참견과 말의 격에 대한 무심함으로 발생한 가벼운 말잔치는 결국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에 비롯된다. 할 수 있는 것과 잘하는 것, 그것을 취미로 하는 것과 업으로 하는 것의 차이를 간과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취미로 하는 사람의 할 수 있음과 사적이며 책임 없는 경험이 만든 자신감에 기대어 업으로 하는 사람의 진지함을 가볍게 여겨서 발생하는 일이다.

'리스펙트'의 조건


앞서 언급한 NBA의 사례를 다시 생각해 보자. 이 사건은 그저 신구 대립의 구조로 해석될 것이 아니다. “리스펙트”, 존경과 존중의 문제다. 저번 아시안 컵 때 있었던 소위 “탁구 게이트”도 같은 맥락이다. EPL 상위권 팀에서 10년 가까이 뛰고 있는 손흥민 선수에게 대들려면 그만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증명할 수 없다면 “리스펙트”해야만 한다.

종종 다른 나라에선 이런 선후배 논란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단순히 나이를 기준으로 위계와 상명하복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걸어온 발자취로 “리스펙트”가 발생하고 그 “리스펙트”를 받는 고참이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손흥민 선수가 바로 그런 예다. 최근 토트넘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 다종다양한 선수들을 잘도 팀으로 하나로 묶었구나 싶어 새삼 손흥민 선수가 대단해 보였다. 국적과 연차를 막론하고 이 토트넘 선수들이 손흥민 선수한테 품고 있는 공통 된 마음은 “리스펙트”다.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하부리그가 수도 없이 있고 그 리그마다 수십 개의 팀이 있는 영국의 1부 리그, 그것도 상위권 팀에서 주전으로 십 년 이상을 뛰면서 백골 이상을 넣고 십 년 이상 두 자릿수 득점을 하고, 심지어 득점왕도 했으며 챔피스언스 리그에선 거의 우승할 뻔도 했던 선수에게 이들은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인터넷으로, 유튜브로 모든 걸 배울 수 있고 AI가 모든 걸 가르쳐 줄 수 있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사람만이 갖고 있고 사람이 만든 것만이 갖고 있는 아우라가 있다. 오랜 세월 한 가지 일을 해 온 장인만이 갖고 있는 노하우가 있다. 나는 할 수 없고 그럴 능력도 없는 영역에서 꿋꿋이 한 길을 걸어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성과가 모여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이뤄지는지 모른다. 이 사회를 완성시키는 그 장인들의 조각, 그 조각을 만든 모든 이들에게 우린 지금 “리스펙트”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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