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가 예감된 승부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올 2월 말이면 딱 열두 살이 되는 딸은 이번 겨울 방학에 한 달 정도 미국에 머물다 왔다. 그것도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갔다 왔다. 물론, 당연하게도, 보호자 없이 가는 서비스를 받았지만. 올 초, 아내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딸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혼자 갈 수 있다고 했다. 솔직히 잠시라도 머뭇거렸으면 좀 더 커서 가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딸은 두려움 없이 게이트를 건너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만에 돌아온 며칠 후 학생회장 선거를 준비했다.

경기도 화성시 병점중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이 1학기 학급자치회장ㆍ부회장 선거 투표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경기도 화성시 병점중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이 1학기 학급자치회장ㆍ부회장 선거 투표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출마지원서를 내기 며칠 전 딸은 약간 망설였다. 패배의 확률이 컸기 때문이다. 딸은 결국 선거에서 졌다. 남학생이 대략 30여 명 정도 많은데다가, 형이 학생회장이었던 연년생 동생은 버거운 상대였다. 선거 며칠 전, 난 솔직히 딸에게 내 예상을 말해줬다. “남자 애가 이긴다면 박빙, 네가 이긴다면 제법 차이가 클 거야.” 내 예상대로 표는 여덟 표 차이. 남학생 표를 제법 많이 흡수했지만 졌다. “잘했어.”, “괜찮아. 중학교 때 다시 도전하면 되지.”와 같은 말은 안 했다. 다행이고, 괜찮은 패배는 없고, “졌잘싸”라는 단어는 말잔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루 정도 마음고생을 한 딸은 스스로 회복한 뒤, 6학년이 되면 반장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남학생하고 일대일로 붙을 것 같으면 나가지 말라고 했다. 그 후, 생각해보니 그건 어디까지나 노쇠한 아빠의 생각이었다. 도전을 하는 것도, 출사표를 던지는 것도, 그래서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감수하는 것도 딸의 몫이다. 지금까지 딸은 두려움 없이 도전해 왔고 몇 번의 승리와 패배를 맛봤다. 승리를 당연시하지도 않고 패배에 절망하지도 않았다. 다시 도전하겠다는 건 패배를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그건 그만큼 강해졌다는 의미다. 지는 사람은, 질만큼 강하다. 승부하지 않는 사람은 지지도 않는다. 지는 사람의 강함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패배는 끝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패자부활전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일본은 우리보다 더 하다. 패배와 실패가 수치스러워서, 그런 형제, 자식, 배우자를 둔 가족까지 그 수치심을 함께 겪을 것 같아서 엄청난 빚은 물론이고 입시의 실패, 사업 실패, 결혼 생활의 실패를 이유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의 <인간 증발>이라는 책과 같은 내용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매년 십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이렇게 사라지는 현상을 일본에선 증발(増発), “조하츠ぞうはつ”라고 하는데, 이들의 증발을 돕는 “밤 이사 전문” 업체도 있다.

 

이 사업의 기원을 90년대, 버블 경제의 끝 무렵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니, 그렇다면 이 현상은 삼십여 년이 훌쩍 넘은 현상이다. 이런 사업과 현상 “덕분에” 자살이 줄었다는 말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다종다양한 실패와 그로인해 겪는 좌절과 절망, 그리고 그것을 함께 가족이 겪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심리가 일본 사회에 여전하다는 것이다. 아직 우리 사회는 괜찮은 걸까?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 현상이 이십여 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는 말도 있는데 말이다.

요 근래 식구들과 종종 함께 보는 공부와 입시 관련 방송이나 콘텐츠를 보다보니 자식에게 엄청난 기대를 갖고 있는 부모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예전에도 그랬다. 1970, 80년대에 똑똑한 자식에게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통과한 뒤 검사, 변호사가 되거나 외무고시나 행정 고시에 합격하여 고위 공무원이 되길 기대했었다. 반면 요즘 부모들은 똑똑한 자식에게 소위 메디컬이라고 통칭 되는 의대, 치대, 약대, 수의대 진학을 강요 아닌 강요를 하는 것 같다. 공부를 제법 한다고 인식하는 아이들도 그 길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고 말이다. 때문에 의대 진학을 위해 재수 삼수 하는 것도 당연히 여기는 모양이다. 재차 말하건대, 졌다는 건, 질만큼 강하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아주 좋은 대학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말이라는 얘기다. 언제든, 어디서든 그 힘만 있다면 제법 잘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 예를 들어 보겠다. 혹시 종합 격투기를 보는지 모르겠다. 가장 유명하면서 글로벌한 단체는 역시 UFC다. 오가는 돈도 크고 장사도 제일 잘되는 종합 격투기 단체다. 이러다보니 각 대륙과 나라에서 격투기로 주름 좀 잡는다 하는 이들의 꿈은 당연하게도 UFC 입성이다. 때문에 당연히 그 문이 좁다. 설령 그 문을 통과했다하더라도 몇 게임 연패를 하게 되면 계약을 연장 못하고 그야말로 쫓겨난다. 설령 몇 게임 연승했다하더라도, 각 체급에는 소위 상위 랭커로 올라가기 전에 꼭 만나야 되는 수문장 같은 선수들이 있다. 이 선수들은 패보다 승이 많은, 최소한 열 번 이상 싸운 노려한 선수들로 몇 번 연승만 하면 타이틀 도전도 가능한 선수들이다. 대부분의 기세 좋던 신참들도 이 수문장들에게 지면 급격히 하락세를 겪는다. 그 하락세가 길어지면, 당연히 계약 연장은 불발된다.

UFC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는 반더레이 실바. (사진=UFC 제공)
UFC 명예의 전당에 올라가는 반더레이 실바. (사진=UFC 제공)

그렇게 UFC를 떠난 이들은 어디로 갈까? 좀 작은 단체로 간다. 대륙에 기반을 두거나 글로벌하지만 브랜드 인지도는 조금 떨어지는 단체로 말이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단체를 바꾼 이들이 그 단체에선 금방 강자로 자리 잡는 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리 잡은 뒤 타이틀에 도전하고 그 단체의 챔피언이 되면 다시 UFC의 문을 두드린다. 은퇴하기 전까지 이런 도전은 계속된다.

질만큼 강한 사람


필자는 대략 십여 년 전, 앞서 언급한 <인간 증발>이라는 책과 이런 내용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우리도 조만간 이런 현상을 겪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앞서 말했듯 일본의 자살률 감소는 “증발률”의 증가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살률이 증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간 자살 대신 이렇게 사라짐을 택하는 사람들이 등장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사라짐의 현상이 우리의 현상이 되기 전에 우리는 진 사람에 대해, 패배 그 자체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도전했지만 진 사람에 대해, 질만큼 강하기에 언제든 다시 도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그랜드 캐니언. (사진=이코노미톡뉴스)
그랜드 캐니언. (사진=이코노미톡뉴스)

딸은 텍사스에 머무는 동안 그랜드 캐니언을 보고 왔다. 그랜드 캐니언으로 떠났던 로드 트립의 여정은 뉴멕시코 주와 애리조나 주를 거쳤다. 이 땅들은 멕시코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시카리오>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수많은 멕시코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아 국경을 넘어 처음 만나는 미국의 영토가 바로 이 주들이다. 그렇게 밀입국에 성공한 이들은 자식들을 미국에서 낳고 키워 미국 사람으로 만들고 자신들도 긴 세월 후 여러 조건을 갖춰 미국 시민이 된다. 말 그대로 가능성의 신대륙에서 가족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다.

우리에겐 이렇게 월경(越境)이 가능한 신대륙은 없다. 그렇기에 더욱 더 이 땅에 새로운 기회가 있다는 걸, 몇 번을 지더라도 재도전의 기회가 있다는 걸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줘야 하지 않을까? 일류의 삶이 아니어도 충분히 삶을 버티고 살아낼 만큼 강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줘야 하지 않을까? 좋은 대학이나 의대에 도전하든, 취업과 승진에 도전하든, 그 도전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그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음 기회,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믿었으면 좋겠다. 그 믿음을 갖고, 박노해의 시의 제목을 빌려와 말하건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말하기 어려운 고민 또는 우울감을 느끼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으면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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