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Winter is Coming”이라는, 유명한 대사에 담긴 비장함처럼 필자는 이상하리만치 겨울이 오기 전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지금이야 겨울에도 딸기가 나오고 구하기 힘든 식료품도 없지만 겨울이 오면 은근히 솟아나는 초조함을 억누를 수가 없다. 어쩐지 냉장고도 더 채워놔야 할 것 같고 따뜻한 부산에 산지 20년이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옷도 새로 장만해놓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런 겨울도 끝났다. 동백은 1월부터 있었고 성질 급한 매화는 설 전에 이미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 겨울은 유독 유난스럽지 않았나? 가을 같은 온화한 날씨가 이어졌다가 강추위가 며칠씩 이어졌다. 삼한사온의 리듬에 적응 된 이에겐 더 적응하기 어려운 겨울이었다. 이 겨울이 끝난 걸 기념하여 혹독한 겨울이 나오는 영화 한 편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려 한다.

영화 '더 그레이'
영화 '더 그레이'

 

던져진 '삶'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은 알라스카 유전 지대에서 일하는 인부들을 야생 동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는 사냥총 하나에 의지해 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틈틈이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알라스카의 추위만큼 삼엄한 임무를 끝낸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과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잠시 후, 이륙한 비행기는 사고로 추락하고 몇몇이 생존한다. 알라스카의 추위, 여기가 어딘지로 모르는데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 구조를 요청할 방법도 사라진 지금, 그들은 스스로를 구조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한다. 그들의 그 여정에 늑대들이 따라 붙는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생존의 투쟁이자 잔혹한 야생과의 싸움이 내용의 전부인 이 영화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인생은, 마치 이 영화에서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던져진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야말로 피투(彼投) 된 존재다. 마치 언제나 낯선 도시의 적절치 못한 곳에 떨어지는 <터미네이터>의 전사와 사이보그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부모도, 사는 곳도 선택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부조리는 여기서 출발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인간은 긴 세월 양육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나가 1인분의 삶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진 최소 이십 년 가까이 걸린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지점은 양육에만 있지 않다. 부모의 곁을 떠나 사회에 나왔을 때, 사회와 국가라는 시스템은 구성원이자 국민인 인간을 보호한다. 법으로부터 인정받은 존재는 보호되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건 만만치 않다. 세상도, 현실도 냉혹하다. 자본주의 사회와 국가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 무한 경쟁이라는 야만의 논리 앞에 무력해지곤 하기 때문이다. 이제 경우 세상에 나온 청년은 제 한 몸을 움직여 생존의 조건을 갖춰나가야만 한다. 요즘 친구들 표현을 빌리면 독립을 하는 순간부터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이 나간다.

"한 번 더 싸움 속으로...
내가 아는 마지막 멋진 싸움으로.
이날에 살고 죽으리...
이날에 살고 죽으리...
선택 앞에서"

영화 더 그레이

 

영화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이 시는 앞서 말한 던져진 삶과 성인이 된 후 마주하게 되는 냉혹한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야 될 것이 있다. 선택에 관한 은유도 담겨 있다는 것이다. 태어남은 선택할 수 없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삶의 순간들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떨어지는 곳은 선택할 수 없지만 그 이후의 투쟁과 생존은 선택할 수 있었던 <터미네이터>의 전사처럼 말이다.

야생에 떨어진 비행기처럼 피투 된 존재에겐, 다시 실존주의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한 번 더 싸움 속으로” 가겠다는, 기투(企投)의 선택이 남아 있다. 이 선택의 순간 우린 무한한 가능성에 직면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 갈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도 느낀다.

우리의 주인공 역시 무수한 선택 끝에 여기까지 왔다. 주인공의 회상을 통해 그 역시 알래스카라는 냉혹한 땅을 스스로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도 부모와 고향이 있었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보호받는 존재에서 보호자로 나아갔던 삶은 어느 순간 야생의 세계로 나아갔고 그 나아감은 그의 선택, 영화에선 다뤄지지 않는 수많은 선택의 결과다.

추위와 늑대 무리에 맞서기 위한 일종의 보호막으로써 비행기의 잔해를 거처 삼아 구조를 기다릴 수 있다. 이 또한 선택이다. 구조의 기다림이 막연하다면 우린 또 선택해야 한다.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문명의 세계로 나아가 스스로를 구조하기 위해 애쓸 것인가.

영화 속 인물들은 후자를 택했다. 관객은 전자의 가능성에 대해 알 수 없다. 당연히 영화 속 인물들도 선택하지 않은 것 뒤에 따라올 결과를 알 수 없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선택하지 않은 삶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고 선택한 여정 또한 불투명하다. 최후의 야생과 마주하기 전, 그는 총 한 자루로 야생과 문명의 경계에서 문명을 지켜내던 사람이었다. 그라는 존재 자체가 그 시스템의 최후의 보루였다. 그랬던 그가 비행기가 추락한 뒤 경계와 시스템이 없는 야생에 맞서는 걸 선택했다. 총도 시스템도 없다. 그저 냉혹한 야생만이 있을 뿐이다.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사진=위키피디아)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사진=위키피디아)

 

마지막은 알 수 없다.


영화는 달리 우리의 마지막은 알 수 없다. 하루가 어떠했는지는 해 질 녘이 되어야만 알 수 있듯이, 인생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두려움 없이 삶의 매 순간을 응시하며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아직 평가는 이르다. 언제 평가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마지막 순간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또 할 수 있는 건,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시를 읊조리며 전의를 불태우며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다.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은 늑대 무리와의 마지막 결투를 준비하며 저 시를 읊조린다. 우리 또한 주인공처럼 인생의 고난과 마주할 때가 있다. 삶의 냉혹함 앞에서 무기력을 느낄 때가 있다. 최선의 선택이라 생각하고 묵묵히 걸어온 끝에 실패와 절망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 순간을 맞이할 우리를 위해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안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영웅들의 조건-누군가 영웅이 되고자 원한다면, 먼저 뱀이 용으로 변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적당한 적수가 그에 없는 셈이다.”

영화는 늑대 무리와의 마지막 결투를 결심한 주인공이 결의를 다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렇게 영화 속 겨울은 혹독하고 주인공의 둘러싼 늑대 무리는 자비를 모른다. 우리의 현실은 이보다 좀 낫지 않을까? 겨울 같았던 인생의 시련을 견딘 후에 나도 모르게 영웅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영웅이 되어 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용을 물리치고 왕국의 영원한 평화를 찾아온 기사의 은빛 갑옷에 꽃무늬가 윤슬처럼 물결치는 그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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