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는 계속 된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딸은 요즘 판타지 소설에 빠져 있다. 열두 살의 취향이다. 대출해 오는 책 중 한 권은 이런 소설이다. 지난여름 방학 땐 성경책처럼 두꺼운 <윙 페더 사가> 1권을 빌려와 읽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딸이 읽은 대부분의 소설들은 판타지 아닐까? 로알드 달의 <마틸다>와 <찰리와 초콜릿 공장>, 앨윈 브룩스 화이트의 <샬롯의 거미줄>, 최근작인 재클린 웨스트의 <이상한 지하세계와 소원수집가들>, JK롤링의 <크리스마스 피그>와 같은 소설들 말이다. 이런 딸도 어느 순간 판타지와의 동행을 멈출 것이다.

필자가 삼십대까지 함께 해 온 추리 소설과의 동행을 불쑥 멈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과의 여정이 끝난다고 해서 판타지 그 자체와의 여정이 끝나는 건 아니다.판타지는 계속 된다. 결국, 환상적인 이야기, 이야기를 담은 환상, 그 모든 걸 담고 있는 콘텐츠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AI가 일상화 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OTT로 영화를 보고 전자책으로 해리 포터를 읽어도 말이다.

Ready Player One 포스터
Ready Player One 포스터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이런 확신이 들어 있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게임과 그 게임을 위해 형성된 가상 세계를 주 무대로 하고 있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 <썸머워즈(2009)>처럼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썸머워즈>가 현실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가상 세계 속에 있는 적과 싸우는 것이라면 <레디 플레이어 원>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가상의 게임 속 캐릭터를 통해 서로 힘을 합쳐 그 게임과 가상의 세계를 장악하려는 거대 기업에 맞서 싸워, 그 게임과 가상의 세계를 구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더 큰 매력, <썸머 워즈>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관객에게 이야기 외에 다른 볼거리를 준다는 점이다.

대중문화 잡탕 같은 영화의 의미


이 영화는 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음악, 영화, 게임, 만화 할 것 없이 그야말로 판타지 그 자체인 대중문화에 푹 젖어 있었고, 있는 사람일수록 그 재미가 배가 되는 영화다. 영화 속에는 100개가 넘는 캐릭터가 등장하고 수십 곡의 팝 명곡들, 오리지널 콘텐츠의 다양한 패러디와 혼성 모방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의 주인공과 스토리에 몰입해서 보면 볼수록 이 영화의 잔재미를 놓치게 된다. 이렇게 볼 때마다 소소한 재미가 추가되는 이 영화는 필자에게 하나의 질문을 늘 남겼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이제 그 답을 한 번 찾아보려 한다.

이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칠순이 넘어 세상에 내 놓은 영화다. 그전에 그가 만든 영화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조스를 기원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의 여정, 다른 하나는 <태양의 제국>과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뮌헨> 같은 작품을 다른 축으로 하는 소위 아카데미 영화제와 어울리는 묵직한 사유의 여정이다. 이렇게 두 갈래 길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어느 쪽의 영화로도 팬을 실망시키지 않던 그가, 다시 말하지만 칠순이 넘어서 이 온갖 대중문화 잡탕 찌개와 같은 영화를 만든 것이다. 다시 묻는다. 왜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잠시 딴 이야기를 해보자.

꿈을 잃어버린 세대


몇 년 전에 우연히 일본 경제 관련 실용 서적이 눈에 들어 왔다. 제목은 <연수입 200만 엔으로도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이었다. 이런저런 경로로 내용을 알아보니 당시, 그러니까 2020년엔 직장인 연봉이 200만 엔이 기본이 되는 시대인데 그런 시대에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의외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었다. 그런데 내가 더 놀란 건 그 다음이었다. 같은 저자가 2005년에 <연수입 300만 엔 시대를 살아남는 경제학>이라는 책을 썼다는 것. 그러니까 같은 저자가 월급쟁이 직장인을 위한 라이프스타일과 금융 조언을 담은 책을 15년 터울로 썼는데 그 사이 일본 근로자의 연봉이 상승하기는커녕 하락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책으로는 오하라 헨리라는 작가의 <연수입 90만 엔으로 도쿄 해피 라이프>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심지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제목은 <나는 일주일에 이틀만 일하기로 했다.>

모리나가 타쿠로 저서 "연수입 300만엔시대를 살아남는 경제학" 북커버
모리나가 타쿠로 저서 "연수입 300만엔시대를 살아남는 경제학" 북커버

 

그 사이, 그러니까 2005년에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일본의 다양한 사회, 경제 문제들을 뉴스로 접했다. 우치다 다쓰루 선생의 <하류지향>이 나온 것이 2007년이었고, 달관 세대로 번역할 수 있는 사토리 세대가 일본에 출현한 건, 아니 그런 생활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세대에게 그런 이름이 붙은 건 2010년이었다. 이로부터 십년 후 중국에선 집에서 누워만 있는 젊은이를 칭하는 탕핑(躺平)족이 등장했고 미국에선 그야말로 대퇴사 시대가 시작됐으며 유럽에선 니트(NEET-neither in employment nor in education or training)족이 등장했다. 니트족은 취직을 하지도, 취직을 위해 공부를 하거나 직업연수를 받지도 않는 17세에서 24세 사이의 청년들을 말한다. 같은 시기 한국에선 알다시피 N포 세대가 등장했다. 결국, 이 시대는 세계의 청춘들이 꿈을 향한 도전대신 안온한 일상의 유지, 현상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게을러서, 꿈이 없어서가 아니라 꿈을 꾸기엔 이 세상이 각박해서 꿈을 포기한 청춘들이 지구촌 곳곳에 등장한 것이다.

오늘의 현실, 어제의 꿈


세상의 모든 영화는 누군가의 꿈, “발상”에서 시작해 트리트먼트, 시놉시스, 시나리오를 거친 후 감독과 작가, 수많은 스태프와 자본, 배우들의 열연이 합쳐져 완성된다. 영화는 그 결과물 또한 꿈같은 환상이지만 그 탄생의 기원엔 꿈이 있다. 누군가의 착상과 발상, 누군가 들으면 말리질도 모를 원대한 판타지가 있는 것이다. 노감독은 우리 인생도 이와 같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오늘의 현실은 어제 꿈을 꾼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 현실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만이 내일 도래할 더 큰 꿈을 꾼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노장은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누군가 우주여행을 꿈꿨기에 그것이 현실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 로봇이 날아다니는 꿈을 꿨기에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로봇들이 등장했을 것이다. 누군가 수천 대의 차를 실을 수 있을 만큼 큰 배를 상상했기에 그것이 현실이 됐을 것이다.

앞서 말한 일본과 유럽, 미국, 그리고 한국의 청년들은, 현실적인 대안과 오늘의 성공을 찾아 움직이는 청년들은 어떤 꿈을 꿀까? 꿈을 꾸기는 하는 걸까? 얼마 전 한국일보는 한 기사에서 <세이노의 가르침>이나 <역행자>와 같은 자기 계발서가 베스트셀러의 주를 이룬다며 출판 시장의 한없는 가벼움에 대해 탄식을 토했다. 난 이런 책의 유행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다. 청년이 이런 책을 읽어서라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면 열독을 권한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고, 설령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어디 사람의 가치와 행복이 화폐로 다 채워지겠나?

축구국가대표 손흥민의 아버지인 손웅정 감독. (사진=연합뉴스)
축구국가대표 손흥민의 아버지인 손웅정 감독. (사진=연합뉴스)

얼마 전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사회가 ‘성공’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고 본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며 10만원을 버는 것보다 재능이 있고 잘하는 일을 하면서 5만원을 버는 게 행복한 삶 아닌가.”하고 말이다. 현실 감각 없는 이야기 같은가? 이미 주급으로 수억 원을 벌고 있는 아들을 둔, 복에 겨운 아빠만이 할 수 있는 말 같은가? 그건 각자의 판단에 맡기련다.

필자의 열두 살짜리 딸은 여전히 꿈을 꾼다. 지면에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크고 원대한 꿈이다. 그 꿈의 실현 가능성을 저울질 하지 않은 채 품은 꿈이어서 그렇다. 꿈이라고 해 봤자 종이로 된 책 한 권 내보는 게 다인 아빠로서는 감히 이렇다 저렇다,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말할 수 없는 꿈이다. 이런 아빠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꿈을 향해 뚜벅뚜벅 가는 아이의 뒤를 따라가며 지치지 않게 격려해 주고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일 뿐이다.

마라톤 코스 옆에서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제공해주는 자원봉사자들처럼 말이다. 이 사회의 역할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 같은 어른이 청년에게 해줘야 될 일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꿈을 꾸기엔 좀 늦은 어른들이 해야 될 일은 꿈을 꿔야 마땅한 청년들이 계속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갈 수 있도록 응원하고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주는 거 아닐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 영화도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만의 판타지를 세상에 내놓으려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꾼들에게 보내는 격려 같다. 내가 찾은, 스티븐 스필버그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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