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폰이 뭐라고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올 가을, 내 눈에 그저 희한하기만 현상을 인터넷 뉴스로 봤다. 이걸 뉴스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이런 내용이 포털 사이트의 사회 뉴스 코너에 올라와도 되는 건지 따져보는 건 일단 넘어가자. 여하간 내가 본 뉴스의 핵심 내용은 이랬다. ‘갤럭시 쓰는 갤레기 같은 남자는 거른다.’, ‘아이폰 쓰는 허세녀는 믿고 거른다.’는 거였다. 참고로 갤레기는 갤럭시를 쓰는 사람을 비하해서 쓰는 말이라고 한다.

삼성전자, 중국 상하이에서 '갤럭시 Z 플립5' 선상 마케팅 진행했다. (사진=SEC)
삼성전자, 중국 상하이에서 '갤럭시 Z 플립5' 선상 마케팅 진행했다. (사진=SEC)

 

이 뉴스를 본 후, 동해선과 지하철에서 주변에 앉은 사람들의 스마트 폰을 살펴봤다. 다들 그 좁은 스마트 폰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나 같은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찬찬히 살펴봐도 신경 쓰지 않는다. 여하간, 그들이 뭘 했을까? 손가락의 움직임이나 주변 사람들의 액정을 흘깃 보니 별 거 없었다. SNS를 들락거리거나 짧은 동영상을 넋 놓고 보는 것이 다였다. 결국, 아이폰을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딱히 창의적인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갤럭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고리타분한 짓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창의적인 사람이 아이폰을 쓸 수는 있어도 아이폰을 쓴다고 해서 창의적이거나 멋있는 사람이 되진 않는다. 고리타분하고 아저씨 같은 사람이 갤럭시를 쓸 수는 있지만 갤럭시를 쓰는 사람이 패셔너블하거나 창의적이거나 트렌드를 선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스마트 폰 브랜드 하나로 사람을 가늠해 보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무신사
무신사 "숏패딩 이어 패딩백과 패딩 부츠 인기". (사진=무신사 제공)

 

그런데 의외로 다른 제품군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다. 최근엔 특정 브랜드의 자동차를 모는 사람들이 난폭 운전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자동차와 오너를 함께 비하하는 용어를 본 적도 있다. 또 최근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숏패딩 때문에 적게는 30만 원에서 100만 원을 훌쩍 넘는 숏패딩을 사주느라 부모들이 걱정이 많다는 뉴스도 봤다. 아이들은 롱패딩을 입고 다니는 애들을 패딩 거지라고 놀리기도 하고 언제 만들어진 숏패딩인지를 따져가며 신상품인지 아닌지로 계급까지 나누기도 한다고 한다. 부모 입장에선 울며 겨자 먹기의 심정으로 사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물에 끌리는 사람들


사람이 사물에 끌리는 건 당연하다. 사람은 사물을 사고 소유하고 보관하고 자랑한다. 그 사물이 사람을 다르게 보이게 할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을 만들 수는 없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좋아 보임과 달라 보임의 실현을 위해 사물의 소유를 넘어 브랜드의 소유를 욕망한다. 이미지와 영상이 주요 콘텐츠인 다양한 SNS가 이 욕망에 바람을 넣는다. 인스타그래머블이라는 신조어에는 이러한 욕망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이 욕망의 실현에 당연하게도 비용이 지불된다. 좋은 차나 최신 휴대폰은 구매는 물론이고 그 유지에도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때문에 카푸어라는 말도, 폰푸어라는 말도 생긴 것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인스타그래머블한 좋아 보임과 달라 보임을 향한 욕망은 자기완성이라는 환상 추구의 결과다. 소비자들은 종종 어떤 상품만 있으면 자신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과 나하고의 어울림은 브랜드가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낸다. 일단 물건을 구매해서 갖고 있는 건 소유고 오랜 시간의 경과 후에도 계속 갖고 있는 건 보유다. 이 보유하고 있는 사물 중에서도 가치가 높은 것의 보유를 소장이라고 하고 소장하고 있는 것 중에서 특별히 애정을 쏟는 행위를 애장이라 한다. 즉 하나의 사물이 한 개인에게 의미를 발생하기 위해서는 살 때보다는 갖고 있을 때, 더 나아가 긴 시간 갖고 있을 때, 더 나아가 늘 사용하고 애지중지하며 오랜 세월 곁에 두고 있을 때 그 가치가 발생한다. 가치는 시간의 경과와 마음의 옷을 입어야 증폭된다는 말이다.

진짜 소중한 가치


이런 맥락에서 얼마 전 아이가 한 숙제는 의미가 있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금요일마다 글쓰기 숙제를 내어주신다. 내 입장에서 보면 그 주제가 참신하고 재미있는데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주말 내내 골머리 좀 썩겠구나 싶은 주제들이 대부분이다. 몇 주 전 주제도 그런 주제였다. 십 년이 지나도 갖고 있을 물건 네 가지를 쓰고 그 이유에 대해 쓰라는 것이었다. 십 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열두 살짜리들이 헤아려 볼 수나 있을지, 그 시간이 지난 뒤엔 지들이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감이나 올는지는 둘째치고 우선 요즘처럼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네 가지만 쏙 골라내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숙제를 어떻게든 마무리해야 되는 일요일 저녁, 아이에게 넌지시 무슨 물건을 골랐는지 물었다. 아이가 고른 네 가지 물건은 소박했다. 돌 때부터 늘 끼고 자던 엄마가 만들어준 애착인형인 은순이, <인생 네 컷>에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 각종 상장과 수료증 등을 넣어 놓은 파일, 그리고 각종 글을 써 놓은 일기였다. 그 목록에는 얼마 전 새로 산 삼성 노트북이나 작년에 산 갤럭시 탭, 작년에 삼촌이 사 준 Z플립도 들어 있지 않았다. 내 입장에선 맘만 먹으면 십 년 이상도 쓸 수 있는 제품이고 아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것들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데얀 수딕
데얀 수딕

런던 디자인 뮤지엄 관장이며 영국 왕립미술대학 객원 교수인 데얀 수딕은 <사물의 언어>에서 “우리는 물건들을 수단으로 우리 삶의 경과를 측정한다. 물건들을 사용해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존재가 아닌지 표현한다.”라고 했다. 심지어 칼럼니스트 아네테 쉐퍼는 <사물의 심리학>에서 “사물은 자아의 표현일 뿐 아니라 자아의 일부”여서 “어떤 물건을 갖게 되면 물질적 자아가 확장되고, 물건을 잃으면 물질적 자아도 축소된다.”고도했다. 사물은 그만큼 자아의 형성과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 몰입의 이론가로 유명한 미하이 칙센트마이히는 그의 에세이 <Why We Need Things>에서 ”우리가 물질주의에 빠지는 것은 대개 의식의 불안정성(precariousness of consciousness)을 사물의 견고함(solidity of things)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역설적인 욕구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어서 “신체는 우리가 실감하는 자아를 만족시킬 정도로 충분히 크지도, 아름답지도, 영원하지도 않다.”라고 말하면서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힘의 증폭과 아름다움의 고취, 미래로 확장될 기억을 위한 사물을 필요로 한다.”라고 지적한다.

필자에겐 티타늄으로 만든 반지가 있다. 아내가 연애 시절 선물해 준 것이니 얼추 이십 년이 훌쩍 넘은 반지다. 평범한 디자인의 반지는 티타늄의 희귀성 때문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산 세월 때문에 내게 가치가 있다. 모든 사물이 그렇다. 사물 그 자체는 홀로 빛날 수 없다. 사물이 사람 덕에 빛나야지 사람이 사물 덕에 빛나서는 안 된다. 그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캐리어의 디자인과 그 브랜드로 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과 취향을 엿볼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의 진가는 그 안에 담긴 짐으로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은 갤럭시보다 우주적이고 티타늄보다 단단하다. 세상은 당신이 어떤 사물을 갖고 있는 지로 당신의 오늘을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당신이 세상에 어떤 새로운 가치를 더하고 만들어내는 지로 당신의 미래와 역사를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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