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선 말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최근 온라인 게시판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망해가는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글>,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눈에 띠는 몇 구절, 그 중에서 그나마 무난한 것만 옮겨 보겠다.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하면 가스라이팅, 애인 있느냐 물어보면 무례한 인간, 듣기 싫은 조언하면 꼰대, 시어머니 한마디에 시월드, 가족한테 헌신하면 퐁퐁남.... 모은 돈 적으면 김치녀, 집 못해 오면 무능력남... 데이트 비용 무조건 반반, 독박육아 아웃... 사랑뿐이면 현실 감각 제로, 헌신하면 노예근성, 양보하면 호구, 배려하면 오지랖, 조언 따르면 팔랑귀, 가르쳐주면 꼰대.... 호구 혐오의 시대, 손해 보면 병신인 세상, 싫은 건 절대 안하는 세태... 혼인율 출산율 바닥, 남녀갈등, 세대갈등, 이념갈등, 고부갈등... 호구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글감을 찾아 이런저런 게시판과 포털 사이트를 오가다보면 이런 내용의 글은 쉽게 볼 수 있다. 물론 제목과 내용이 좀 과한 것이 사실이다. 요즘 친구들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내 글이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으려면 소위 ‘어그로’를 끌어야한다. 쉽게 말해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주목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현실을 좀 과장되게 표현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렇다고 없는 말을 한다고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없다.

네트워크 그물망. (사진=AI 이톡뉴스)
네트워크 그물망. (사진=AI 이톡뉴스)

점점 좁아지는 그물


이런 글에 담긴 사회 현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항대립을 바탕으로 한 편 가르기다. 나와 너를 가르고, 우리와 그들을 가른다. 이 가름은 월장(越牆)과 월경(越境)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고, 중립과 무소속의 자유를 폄훼한다. 우리 편하고만 연결하는 이들의 연결을 네트워크라 부를 수 있을까? 모두와 연결될 수 있는 시대에 이 연결은 덩어리진 연결, 이음선이 끊어진 단절된 그물이다.

네트워크는 당연하게도 Net와 Work의 합성어다. 네트워크는 망을 만들어가는 행위이자 망 안에서 일을 하는 것이며 망이 하는 일과 일의 과정에서 망을 구축하는 것도 포함할 것이다. 이 망의 가치는 결국 사람이 망에서 일을 하든, 일을 하며 망을 만들든지 간에 개별 선의 튼튼함과 망의 넓이, 더 나아가 그 망의 유지와 확장성에 있을 것이다. 망의 가치가 이러하다면 망이 그 자체로 머물러 있다는 건 망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망의 한 선분을 이루고 있는 개인 또한 망 밖으로 탈주와 연장의 선을 뻗어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런 망은 단절되고 안으로 웅크린 망이다. 바다의 한 뼘, 한 귀퉁이를 막아 자기가 필요한 물고기만을 잡는, 어선의 그물 같은 망이다. 타자의 포획을 위해 자기를 중심으로 펼쳐 놓은 망이다. 그 망이 더 좁아지면 망이라기보다는 통발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 망으로 외피를 둘러싼 좁디좁은 통발 말이다. 거미줄처럼 밖으로 뻗어나가는 망의 확장이 아니라 밖의 것을 안으로 불러들여 오직 내 것으로만 만들려는 통발 말이다.

생쥐. (사진=AI 이코노미톡뉴스)
생쥐. (사진=AI 이코노미톡뉴스)

 

편 가르기에서 고립으로


망이 좁혀지다 못해 통발처럼 작아지는 이유는 뭘까? SNS를 몇 년 해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다른 사람들의 친구 목록을 봐도 다들 끼리끼리 모여 있었다. 다양성과 확장성, 무한한 접촉 가능성이 있는 온라인 세계라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과 이념, 성향으로 인해 통발처럼 네트워크가 나를 중심으로 좁혀지는 것이다. 편향된 네트워크다. 다른 그물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단절 된 네트워크, 네트워크의 단절이다.

이러한 고립과 장벽 세우기, 편 가르기가 반복되면 그 끝엔 개인의 고립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개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극단주의는 극성을 부린다. 편 가르기는 호황을 맞는다.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하게 알 수 있다. 당신의 편은 당신 곁에 없다. 온라인상에서 당신의 글과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영국의 경제학자인 노리나 허츠가 <고립의 시대>에서 말한 것처럼 오랫동안 격리되었던 외로운 생쥐는 낯선 생쥐를 보면 공격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그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웃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 못할 때 환경이 얼마나 적대적이고 위협적으로 느껴지는지 생각해보자. 비접촉 시대의 위험성은 우리가 서로에 관해 잘 알지 못하게 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이 좀처럼 들지 않게 되고, 서로의 필요와 욕구에 무관심해진다는 점에 있다.”

고립의 시대(The Lonely Century, 초연결 세계에 격리된 우리들) 커버 이미지.
고립의 시대(The Lonely Century, 초연결 세계에 격리된 우리들) 커버 이미지.

 

청춘들의 분노가 담긴, 앞서 옮긴 것과 같은 글을 온라인에서 읽다보면 그 글이 호소의 다른 형태로 읽힌다. ‘외롭다. 사는 게 힘들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랑을 주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다.’ 이런 간절한 호소로 들린다. 뒤이어, 혼자 방에 앉아 그 글을 적고 있는 웅크린 뒷모습도 보인다. 오랫동안 책상 앞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공부를 한 뒤 세상에 나왔는데 그 공부만으로는, 그 공부했던 것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닫고 다시 새로운 학원과 낯선 카페에서 등을 구부린 채 스펙 쌓기 공부를 하고 있는 청춘들의 여윈 뒷모습이 보인다.

고립과 극단주의를 넘어


정보가 넘쳐나고 그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21세기에 자신의 신념 안에 갇혀 있는 극단주의가 더 위세를 부리고 있다. 누구와도 연결이 가능한 시대에 은둔형 외톨이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아니 그저 다른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그 의지 자체가 소멸된 것이다.

총선이 다가오는 봄, 곳곳에서 청년을 귀하게 모실 것이다. 그런 자리에 가면 직간접적으로 “너는 어느 쪽이냐?”는 질문을 들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정치적 색채와 그 편향성이 큰 지역일수록 자주, 또렷이 전해진다. 이런 질문을 반복해 듣다보면 어쩐지 어느 편에라도 들어가야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지역에서 문화 사업을 한답시고 왔다 갔다 했던 선배 청년이 지역 정당의 눈에 띠어 관련 소위에 한자리 차지한 뒤 지역 정치인의 단계를 밟아 나가는 걸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을수록 “너는 어느 쪽이냐?”라는 질문에 답을 갖고 있는 것이 철이 드는 것이고 어른답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 끝에 결국 어느 편에 들어 편 가르기 동참하면 소통과 탐색의 네트워크는 통발처럼 좁아진다.

이 통발처럼 좁아진 닫힌 사고와 내 편 중심의 관계를 넘어서는 방법으로 아즈마 히로키라는 일본 철학자는 약한 연결과 오배송의 소통을 권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연결과 소통은 확고한 키워드로 검색하여 원하는 답만 얻고 돌아서는 검색이 아니라 나와 다른 해석을 갖고 있는 사람과의 소통, 개념과 정답을 넘어 그것을 풍성하게 하는 맥락과 가능한 모든 답으로 향하는, 검색을 넘어서는 탐색이다. 자신의 컴퓨터에 저장 된 “즐겨찾기”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서핑, 이미 등록 된 친구와의 접촉, 그래서 들어야 될 말과 하고 싶은 말만 있는 닫혀 있는 커뮤니케이션 공간, 마치 수취인이 정해져 있는 택배와 우편물 배송과 같은 정보 찾기와 단선적인 커뮤니케이션을 넘어서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내가 미처 몰랐고 예상치 못했던 뭔가가 느닷없이 내게 와 닿는, 말 그대로 오배송과 같은 소통이다. 이런 소통과 탐색은 통발과 같은 고립 된 네트워크가 아닌 진정한 네트워크 구축을 향한 하나의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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