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전우 이광노 회장 등 20여명

파월 비둘기부대 경비대대
‘101회’ 노병들의 만남
참전전우 이광노 회장 등 20여명
전승일 4월 2일 국립현충원 참배


글/박민식 편집위원(제101경비대대 보급관중위· 대령전역)

▲ 박정희 대통령과 서울시민 3만여명이 참석하여 동대문 서울운동장에서 파월 비둘기부대 장병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환송대회 장면

대한민국 국군의 최초 해외파병인 비둘기부대 파월 50주년을 맞는 감회가 이루 말할 수 없다. 1965년 3월, 비전투 부대인 비둘기부대 경비를 맡은 제101경비대대 일원으로 참전했다. 당시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들은 7080 노병(老兵)이 되고 상당수는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101회’ 전우 20여명을 만나는 날

▲ 초대 비둘기부대장 조문환준장 (전 특전사령관)
▲ 이광노 초대 101경비대 대장,전 수도군단장

제101경비대대 참전 전우들은 당시 대대장 이광노(李光魯) 회장을 중심으로 ‘101회’를 구성 정기적으로 만나지만 날이 갈수록 참석자가 줄어든다.
올해도 오는 4월 2일 제101경비대대 ‘전승일’에는 국립현충원에서 그리운 전우들을 만나게 된다. 필자는 전승일 만남에 앞서 101회 회원 가운데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유일한 민간인 정회원인 손주환(孫柱煥) 전 공보처장관을 만나 회원들의 안부를 나누었다. 언론계를 거쳐 정·관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손 전 장관께서도 자꾸만 줄어들고 있는 101 회원들의 안부가 안타깝다고 말했다.
참전 전우회 주소록에는 이광노 회장을 비롯한 21명의 명단만 올라있다. 전사하거나 별세한 회원이 11명이다. 당시 본부 중대장 주헌철, 탄약장교 유영대, 단장 보좌관 안현태 등이 국립서울현충원, 대전현충원 등에 잠들고 있다.
지난 50년 세월이 전우들의 운명을 이렇게 갈라 놓은 것이다.

월맹 정규군 기습격퇴 첫 승전기록

▲ 파월 장병 환송 장면. (65. 2. 9)

비둘기부대는 1965년 2월 서울운동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환송대회를 거쳐 부산항에서 LST 편으로 출항했다. 1주일 항해 끝에 사이공의 서북 22km 지점, 비엔호아성 ‘디안’(Dian)에 주둔하여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부대 임무가 개시됐다.
비둘기부대는 단본부 예하 자체 경비를 위해 통상의 대대규모를 훨씬 능가한 제101경비대대를 앞세워 제127공병대대, 제801수송자동차 중대 및 해병 제1 독립공병 중대로 편성됐다.

▲ 하늘에서 본 당시 비둘기부대 본부.

부대장은 육사 7기 출신의 조문환 장군, 경비대대장은 이광노 중령, 필자는 경비대대 본부의 참모 보급관이었다.
비둘기부대에 앞서 1964년 9월에 파월되어 붕따우에 주둔하고 있던 제1 이동외과 병원과 월남군을 교육하고 있던 태권도 교관단 13명도 비둘기부대가 관할했다.
제101경비대대는 디안 주둔 2주만에 막강한 월맹 정규군의 사전 준비된 기습공격을 받았다. 월맹군은 최초의 파월부대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로 로케트포와 박격포를 동원하여 부대 통신망과 지휘부를 맹공격했다. 그러나 101경비대대는 강력한 장비와 화력에다 훈련된 전투력으로 적을 격퇴함으로써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 건설지원단 부대 표지.

월맹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도주하면서 한국군의 용맹 위상에 놀랐을 것이다. 월남군과 주월 미군사령부도 한국군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들었다.
제101경비대대 첫 승전을 바탕으로 사이공에는 채명신 장군의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설치되고 전투부대인 호이안의 청룡부대, 퀴논의 맹호부대, 닌호아의 백마부대가 차례로 주둔하고 나트랑의 야전사와 군수사도 안전하게 작전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국군 현대화와 경제적 국익증대

국군의 월남전 파병은 정치적 논란이 적지 않았지만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 및 전투력 배양 등 고도의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결단이었다. 그리고 파월에 따른 장병들의 희생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군사 외교적, 경제적 효과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막대하여 국익을 크게 증대시켰다고 확신한다.

▲ 교량신축공사를 마치고 채명신 사령관 현지 준공식 참석.

특히 민간분야의 월남전 특수는 한국경제 개발의 요긴한 재원과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등 문건들을 인용하면 국군의 월남전 참전에 따른 경제적 효과는 당시 화폐가치로 무려 67억2,920만 달러로 집계된다.
무역부문은 △수출 7,630만 달러 △군납 1억3,390만 달러, 무역외 부문에서는 △건설·용역 2억3,210만 달러 △장병들의 국내 송금액 2억5천만 달러 △파월 기술자 송금 1억6,620만 달러 △파월 지원경비 6,530만 달러 △미국의 국군 현대화 지원금 15억 달러 △유·무상 차관 43억 달러 등에 이른다.
이 같은 엄청난 경제적 효과가 국내 경제개발 기반조성 및 각종 개발사업에 요긴하게 활용된 것은 물론이다. 국방 면에서는 미국의 국군 현대화 지원으로 155마일 휴전선에 철책이 구축되고 콘크리트 벙커가 건설됐으며 각종 전투 장비와 훈련설비 등이 확충되었다.
그러니까 월남전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김일성의 직간접 침략에 시달리던 1960년대와 70년대 대북 군사적 전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면서 경제개발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는 평가이다.

반공의 대의를 위한 자유의 십자군

제101경비대대는 6개 중대로 편성된 증강대대로 월남전의 특수성에 맞춰 정규전과 비정규전을 훈련하고 강력한 장비와 화력으로 무장했다.
당초 육군 27사단 79연대 1대대를 모체로 경비대대를 발족시켰지만 체력과 정신력이 확고한 장병들을 공모 선발하여 단기간의 강훈으로 단련시켰다. 이때 지원 장병들은 사지(死地)로 떠난다는 각오 하에 혈서(血書)와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파월부대에 아들이 선발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부 부모들은 부대로 찾아와 눈물로 파월 취소를 호소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 베트공에 의해 파괴된 교량복구공사 장면.

1965년 2월 9일, 서울운동장에서 3만여 시민이 참석한 비둘기부대 파월 국민환송대회에서 박 대통령은 “조국 대한민국의 명예와 반공의 대의(大義)를 위해 월남의 공산화를 막아 자유를 수호해 달라”고 당부하고 6.25 때 우방 16개국이 참전하여 우리나라를 구해준 것처럼 “자유의 십자군으로 장도에 오르는 비둘기부대 장병 여러분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한다”고 격려했다.
파월 직후 101경비대대가 월맹군의 첫 기습공격을 물리치고 승전한 후에는 파월부대 방문자와 위문 연예인들을 통해 장병들의 용맹상이 속속 전해왔다. 이 무렵, 1965년 6월 19일, 박 대통령은 이광노 대대장에게 친필 서한을 통해 “군기가 엄정하고 사기가 충천하여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각종 보고에 감격하여 눈시울이 뜨겁다”고 말하고 “대통령의 입장을 떠나 전우의 한 사람으로, 국민의 한 사람으로 감격과 기쁨을 금할 길이 없다”고 치하했다.
제 101경비대대 참전 전우회는 이 같은 내용의 박 대통령 친서를 지금껏 전우회 수첩에 전문 복사 게재하여 그때 그 세월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디안’ 주둔지의 잊을 수 없는 대민봉사

▲ ▲박정희 대통령이 비둘기부대 제101경비대대 대대장 이광노 중령에게 보낸 친필서한.

비둘기부대가 주둔했던 ‘디안’은 인구 3만명의 낙후지역으로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이래 외국인에 대한 배척심이 쌓여있었다. 주둔지로부터 반경 20km 내에는 월맹 정규군 뿐만 아니라 지역 베트콩들이 활약하여 밤이면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둬가고 미군과 한국군에 관한 정보도 수집했다.
비둘기부대는 파월 주둔지 방어를 이 같은 정보에 대응하여 충분한 준비와 훈련을 쌓았다. 부대 외곽에는 흙으로 장벽을 쌓아 잔디를 입히고 포격에 대비한 지하 참호시설도 구축했다.
주둔지 일대가 옛 철도청 부지이기에 침목과 폐철로가 많아 지하시설에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주둔지 전방에는 3중으로 윤형 철조망을 설치하고 20m 간격으로 대인지뢰, 조명지뢰 및 크레모어도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전방 4km 일대를 작전지역으로 설치해 주간에는 수색 정찰조, 야간에는 매복조를 운영하며 로케트포와 박격포에 조명탄과 고폭탄도 쌓아두고 대비했다.
인접 월남군 민병대와 미군부대와의 협조 체제도 강화했다. 한편으로는 베트콩과 지역주민들을 격리 차단시키기 위한 대민 심리전에도 열성을 쏟았다.
부대 인근 빈곤자들에 대한 각종 구호활동, 진료봉사, 기술교육 등을 통한 지역주민 자조사업 지원 및 위문공연, 초청행사, 방문행사 등 친선활동을 통해 유대를 강화할 수 있었다. 월남인과 한국인 사이는 같은 동양계로서 분단국과 피식민지의 약소국 처지에다 한자문화권에 유교와 불교 등 문화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친밀감과 우호감을 조성할 수 있었다.

▲ 월남주민들에게 의료봉사를 하는 모습.

그 뒤 한국군이 철수하고 월맹으로 통일된 후 한·베트남이 수교하여 첫 주둔지를 방문했을 때 옛 비둘기부대의 대민지원, 봉사활동에 감사하는 우호적인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던 것이 보람이다.
비둘기부대 파월 50주년, 제101경비대대 첫 전승일을 눈 앞에 두고 참전 전우회 명단을 뒤적이며 먼저 간 옛 전우들의 명복을 빈다. 오는 4월 2일, 국립현충원에서는 대대장 이광노 회장(수도군단장 역임), 중대장 심기철(그리스, 말레이시아 대사 역임), 신우식(5사단장 역임), 소대장 장재식(남성대 골프장 대표 역임), 종군기자 손주환 님(공보처장관·서울신문 사장 역임)등 20여명의 전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날 박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비둘기 부대장 조문환 장군(특전사령관 역임), 사병 묘역에 안장된 채명신 주월사령관 및 많은 참전 전우들의 묘소에 헌화·참배할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8호 (2015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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