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김학렬, 입 험한건 천하공지 아니냐”

[경제개발시대 EPB 취재기(10)]

엄격·돌직에 자상한 측면
巨人·奇人의 불꽃인생
“이 김학렬, 입 험한건 천하공지 아니냐”


글/崔禹錫 (최우석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주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

▲ 명쾌한 성품의 김학렬 부총리

김 부총리는 우수한 공무원은 머리도 좋아야 하지만 호된 단련 끝에 나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무시무시한 벼락이 떨어졌다. 촌놈, 바보, 무식한 놈은 점잖은 편이고 병신, 개새끼, 소새끼 소리가 예사로 튀어 나왔다. 다른 부처 사람들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상공장관 앞에서 기획원 최모 과장이 “개새끼 나가 죽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최 과장은 태연했다. 나중 비서실로 나와서 상공장관이 “최 과장 그런 소리를 듣고 화가 안 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 과장은 “개새끼” 하면 제 귀엔 자동적으로 “최 과장”하고 바뀌어 들립니다. 그 정도는 보통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독설·험담으로 무한 독려… 욕먹어야 출세

김 부총리는 아끼고 관심 갖는 사람일수록 욕을 많이 해 욕을 많이 먹어야 출세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간부 훈련도 매우 무서웠다. 차관 때와 마찬가지로 간부회의 때 경제지표를 차례로 물어 모르면 “네놈들이 알면 기적이지” 하며 줄줄이 세워놓기도 했다. 어떤 땐 간부교육을 시킨다고 사무관 이상을 모두 식당에 모아 놓고 훈시를 하거나 강연을 듣게 했다. 그 자리에서 김 부총리는 기발한 이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즉 비만한 사람은 통계적으로 머리가 나쁘고 몸이 가냘프고 여윈 사람 중에서 천재가 나올 확률이 많다 했다. 그러면서 김 부총리 자신 같이 생겨야 머리 좋고 천재적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크게 웃으니 모두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똑똑한 사무관에게 테마를 주고 연구를 시켜 발표케 했다. 한번은 물가안정에 대해 발표하는데 “좋은 물가정책이란 무조건 값을 안 오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를 물가는 오르되 내려야 할 물가는 내리게 하는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하자 “굿, 엑셀런트” 하면서 매우 칭찬을 했다. 그 사무관은 부총리의 눈에 들어 순탄하게 올라갔다. 결재를 하다가도 만족하면 “굿”인데 화가 나면 서류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 머리가 안 돌아간다든지 요령을 피우면 벼락이 떨어졌다. “부총리인 나도 새벽부터 일어나 서류를 챙기는데 담당자가 그것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다그쳤다. 심지어 “너 나가다가 기획원 돌담에 머리를 콱 부딪쳐 봐라. 너 같이 머리 나쁜 놈은 혹시 충격으로 머리가 좋아질지 아느냐” 하는 독설도 퍼부었다. 김 부총리의 험구는 널리 소문이 나 기획원 사람들은 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경제장관회의에서도 가차 없이 독설을 퍼붓는데 심지어 국회의원인 정무장관을 보고도 “고명한 경제통이신 X의원께서 그걸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실 리가 없고 우리 실무자 놈이 설명을 잘못 드린 것 같습니다” 하고 비꼬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승진에서 떨어진 어느 과장에게 심한 말을 했는데 그 과장이 아예 그만둘 작정으로 대드는 바람에 김 부총리가 사과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러나 인정도 있어 유망하다 생각한 사람은 파격적으로 해외연수를 시키거나 보직관리를 하기도 했다. 무슨 사정으로 기획원을 떠나려 하면 간곡히 붙잡기도 했다. 김 부총리에게 소위 인정받은 간부는 기합을 받아도 안심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갖은 인격모욕에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김 부총리는 업무 면에서도 무섭게 훈련을 시키지만 사생활 면에서도 자상한 지도를 했다. 공무원 선배로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것 같았다. 한번은 월요일 간부회의 때 “어제 골프장에 갔더니 과장 몇 놈이 보이더군. 모두 다 이마빡에 도적 도(盜)자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어. 과장 놈들이 일요일에 골프장에 오는 것은 도적질 했다고 광고하는 짓이야.” 하고 조심을 시켰다. 사석에서 “공무원은 남의 돈은 극히 조심해서 받아야 해. 협회나 조합 돈은 독약이야 독약. 잘못 먹으면 죽어. 성심껏 일을 봐주고 뒤에 감사하다고 가져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권이 걸린 것은 절대 받으면 안 돼.” 하는 훈수도 했다. 그 당시는 공무원 봉급이 매우 낮아 인사 정도의 사례를 받는 것은 모른 체 할 때였다. 장기영 부총리는 사석에서 공무원이 생활이 안 되니 돈을 안 받을 수는 없고 자기가 받을 수 있는 돈의 10%만 받으면 괜찮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한다. 남덕우 재무장관은 한창 사정(司正)바람이 불 때 직원들을 모아 놓고 “사자는 굶주려도 썩은 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훈시를 했다.
그때는 공무원 부정은 크지도 않고 어느 정도 공개적이었다. 과서무가 모아 놓았다가 같이 회식을 하거나 야근할 때 먹은 외상값을 갚기도 했다. 명절 때엔 설탕, 밀가루, 구두표가 많이 돌았는데 3㎏짜리 설탕표가 인기였다. 업자들이 많이 드나드는 민원부서에선 들어온 티켓을 별 볼일 없는 부서로 돌리기도 했다. 한번은 명절 때 어느 과에 갔더니 신임 과장이 바로 직전 총괄사무관으로 있던 과에 전화를 걸어 “이봐 여기는 밀가루 표 한 장 없어. 밑에 줄려고 그러니까 설탕 표나 밀가루 표 몇 장만 보내” 하면서 기자를 보고 씩 웃었다. 그러나 가끔 한 번씩 사정(司正) 바람이 불면 우수수 희생자가 나오곤 했다.
한번은 김 부총리와 단둘이 만났을 때 “공무원 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는데 어떻게 한 번도 사고가 안 났습니까? 다음에 회고록을 쓰기 위해 기록 같은 걸 남기십니까?”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김 부총리는 “아무리 조심해도 한 번 역풍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는데 그건 운수소관으로 돌려야지. 공무원은 된다 안 된다를 분명히 하고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아야 해. 특히 돈을 거절할 때 조심해야 하는데 절대 원망을 사서는 안 돼. 한국에서 회고록을 준비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야. 조선시대 서찰 한통 때문에 집안이 망한 예가 얼마나 많나. 나는 절대 기록을 안 남겨” 하는 말을 했다. 김 부총리가 유별나게 구니 정보기관에서도 견제를 많이 했으나 대통령의 신임이 워낙 두터워 직접 건드리지는 못했다. 김 부총리는 측근들에게 “나는 못 건드리지만 대신 너희들이 희생될 수 있으니 조심하고 조심하라”며 신신 당부했다 한다.
한때 기획원은 인구 억제정책도 맡았다. 1969년 총인구가 3천만 명을 넘어서고 인구억제책이 국가적 과제가 되자 기획원이 대대적인 인구조절 캠페인을 벌였다. 인구증가율이 3%에서 2%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높을 때였다. 책임자인 기획관리실장 방에 가보면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포스터와 각종 피임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인구 억제정책이 나올 때마다 김 부총리가 약간 계면쩍어 했다. 3남 1녀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부총리는 “가족계획정책이 나오기 전에 낳은 것이며 이미 낳은 아이는 잘 교육시킬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고 변명했다. 1970년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세계은행 총재와 만났을 때나 인구세미나에 가서 기조연설을 할 때, 또 중앙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에 같은 변명을 했다.

언론엔 비교적 우호적, 때론 가차 없는 반격

김 부총리는 평소엔 기자들과 잘 지냈지만 일이 벌어지면 가차 없이 반격했다. 1971년 물가가 오른다는 기사가 자주 나가자 김 부총리는 “선거를 앞두고 일부러 물가를 올려보겠다는 신문사가 있으면 나도 일전불사 하겠다. 그럴 기백도 있고 머리도 있다.”라며 흥분했다. “기사를 가지고 왜 그리 흥분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그동안 쭉 참았는데 너무 심하다. 명예훼손으로 고소감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좀 심했다 싶었는지 “미스터 김 흥분하다. 남자란 것은 흥분할 때도 있어야 한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하면 안 된다”며 웃었다.
자신이 잘 했다고 생각하는 정책에 대해 시비를 거는데 대해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번은 대한상의의 조사보고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왜 신문은 보고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느냐. 설마 상공회의소 건물이 그 보고서를 만들었을 리 없고. 생산이 15.9%나 신장했는데 그걸 평년수준이라 하는 사람은 이 지구상엔 없고 무식한 놈이 유식한 체 하는 덴 구토(嘔吐)를 느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리고는 통계법을 적용해 함부로 통계를 발표하지 못하게 묶어버렸다. 추곡수매가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가 나오자 “김 아무개, 박 아무개가 멋대로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현상이다. 민주주의 아니냐. 나 김학렬이는 자유를 사랑하고 평화를 사랑한다.”고 해놓고는 해당부처에 입조심을 지시했다. 공무원봉급을 대폭 인상한다는 보도가 나가자 “엄포를 놓아도 그럴듯하게 놓아야지 하도 말 같지 않아 상대 않기로 했다”면서 그런 재원이 있는지 예산공부를 좀 하라 했다.
1969년 동경에서 한일각료회담을 한 후 성공적이었다고 자신했는데 언론에서 별 성과가 없다고 나가자 크게 흥분했다. 간부회의에서 “이번 회담에서 유례없는 성과를 거뒀는데 그것을 반대로 보도했으니 기자들은 ‘악의 종자’, ‘악의 씨앗들’이다.”라고 일갈했다. 그 당시 ‘눈물의 씨앗’이란 노래가 유행하고 있었다. 이 ‘악의 종자’란 말이 기자실에 전해져 아우성이 났다. 항의하면서 정식해명을 요구했다. 김 부총리의 반응은 빨랐다. 즉각 사람을 보내 “이 김학렬이가 입이 험한 것은 천하공지(天下公知)의 사실 아니냐. 내가 평소 존경하는 기자들에게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겠느냐. 흥분해서 한 실수이니 너그럽게 봐 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문제 삼기도 힘들고 하여 그 정도에서 끝낸 적이 있다.
당시 한일회담 성과는 발표문만 보아선 잘 알 수가 없었다. 주로 주는 쪽인 일본은 될 수 있는 대로 소극적 원론적 방향으로, 받는 쪽인 한국은 많이 받아 큰 성과를 올린 것으로 발표했다. 한일 간에는 실질보다 명분과 국민감정이 많이 작용했다. 그 위에 직선적 표현을 쓰는 한국과 애매하고 함축적 문장을 선호하는 일본은 발표문을 놓고 지루한 신경전을 벌이곤 했다.

마지막 과업 ‘4대핵공장’ 건설

김 부총리가 마지막 노력을 경주한 것은 4대 핵심공장의 건설이었다. 박 대통령은 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육성에 무서운 집념을 보였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어 주한 미군철수가 논의될 때인데 자주국방으로 북한과 무력대결을 하려면 무기의 국산화가 필요하고 그것은 중화학공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때만 해도 중화학뿐만 아니라 전반적 공업 수준이 북한에 뒤떨어진 형편이었다. 김 부총리는 70년 6월 기자회견을 갖고 중화학종합시책을 발표했다. KIST와 바텔연구소가 7개월간 작업 끝에 낸 보고서를 토대로 한 것인데 한국계 교포인 해리 최(Harry Choi) 바텔연구소 고문이 큰 역할을 했다. 김 부총리는 종합제철로 기초구축작업을 시작했으므로 방대한 자금과 강한 의욕으로 자신 있게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밀고 나가겠다고 했다. 중화학공업은 방위산업의 바탕이 되는 것이고 그 주축사업이 4대 핵심공장의 건설이었다. 흔히 ‘4대핵공장’으로 불렀는데 조선소, 종합기계, 특수강(特殊鋼), 주물선(鑄物銑) 공장이었다. 이 공장들을 되도록 빨리 건설하는 과업이 김 부총리에게 떨어졌다. 기획원은 실수요자로서 조선소는 현대건설, 종합기계는 한국기계, 특수강은 대한중기, 주물선은 강원산업으로 각각 정하고 공장건설을 재촉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탄피 만드는 신동(伸銅) 공장은 풍산금속에 맡겼다. 이들 실수요자에 대해선 정부가 차관도입, 은행융자 등 모든 지원을 다 할 테니 공장을 지으라고 재촉했다.
실수요자들은 처음엔 자신이 없다고 소극적이었다. 실무진에서 달래다 못해 김 부총리가 직접 불러다가 안심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강원산업은 경제성이 없다고 중도포기 해 포철이 대신 맡았다. 이에 대해 정부에서 지원을 충분히 할 텐데 중도포기 하는 것은 애국심 문제라고 말이 많았는데 강원산업 정인욱(鄭寅旭) 사장은 기업은 자체 채산성이 있어야 하며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것은 기업의 정도(正道)가 아니라고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강원산업을 연탄시장을 장악하여 현금이 많았다.
김 부총리는 4대핵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의 협력을 많이 기대했다. 1970년 7월 서울에서 열린 한일각료회담에 앞서 “이번엔 방위산업은 안 다룬다”고 발표해 놓고 실제 4대핵공장 등 중공업계획추진을 위한 재정차관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즉답을 피하고 “3차 5개년계획을 계속 지원한다”는 원론적 수준에서 끝냈다. 이때는 일본으로부터 쌀을 꾸어오는 문제가 매우 급해 거기에 더 매달렸다. 한일각료회담을 하는데도 김 부총리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났다. 장기영 부총리는 끈질기게 매달리고 귀찮게 해서라도 기어코 목표를 달성하는 스타일이다. 감정에 호소하기도 하고 분위기를 만들어 압박하여 철야(徹夜)협상도 강행했다. 김 부총리는 논리적으로 따져 상큼하게 얻어내는 방식이었다. “포철문제 외엔 밤 샐 일이 없다”면서 치밀하게 준비하여 일본 측이 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1969년 동경회의 땐 개회사에서 일본이 자유세계 제2위의 GNP를 올림으로써 세계굴지의 공업국으로 성장한데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고 말했다. 일본이 서독을 제치고 세계2위의 경제대국이 됐으니 한국에 대한 경협도 좀 적극적으로 하라는 포석 같았다. 일본 측 아이치(愛知) 외상은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보고 이웃 일본으로서도 마음 든든하다고 대답해 적당히 방어선을 쳤다. 김 부총리는 차관 얻는 것을 구질구질하게 구걸하는 방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형식적인 회의보다 진짜 실력자를 설득하여 중앙돌파식으로 타결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공식적인 회의는 길지 않았다. 1970년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일각료회담의 경제협력합동회의 때 한 2~3시간 정도 걸릴 거라 생각하고 기자들이 자리를 떴다가 낭패를 본적이 있다. 45분 만에 회의가 끝났기 때문이다. 나중 들으니 김 부총리가 “우리는 개별회의에서 다 말한 만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일본 측은 있느냐”고 물어 “없다”는 대답이 나오자 “그럼 그만 끝내자”고 일어섰다 한다.

조선·기계공업은 군수산업 아닌 평화산업

1971년 동경에서 열린 각료회담에서도 일본 측 미스다(水田) 대장상과의 경협개발회의가 1시간 예정이었으나 40분 만에 끝났다. 김 부총리가 “너무 빨리 끝나니 뭔가 허전합니다” 하니 미스다 대장상은 “부총리께서 너무 능률적으로 회의를 운영해서 그렇습니다. 시간을 짧게 하는 게 경제적입니다”고 했다 한다. 이땐 서울 지하철과 더불어 4대핵공장 차관이 핵심의제가 되었다. 김 부총리는 회담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한일협정에서 약속된 재정차관 2억 달러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단계의 자본협력이 필요하다면서 서울지하철과 농업개발, 중공업차관에 중점을 두겠다고 발표한바 있다. 일본은 한국의 방위산업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이 컸다. 한국 측은 방위산업이 아니라 한국경제가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한 초기 중공업의 육성이라고 우겼다. 김 부총리는 정치적 타결을 시도했다. 한국 방위에 대해 우려를 많이 하던 일본 보수 본류의 측면지원을 받아 원칙적 동의를 얻어냈다. 이 때 결단력 있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후에 수상) 통산상의 통 큰 도움을 받았다. 김 부총리는 “작년엔 후쿠다 대장상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금년엔 당신의 도움이 특히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한다. 두 사람은 일본의 차기 수상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다나카 통산상은 해방 전 한국 대전에서 사업을 한 적이 있고 각료회담에 자주 참석하여 한국을 잘 알았다. 배짱 있는 여당실력자여서 일단 납득하면 화끈하게 밀어 주었다 한다. 그러면서도 전체회의에서 “한국이 많은 프로젝트차관을 요구하면서 그 때문에 수입이 늘어나면 ‘한일 무역역조가 더 확대됐다’고 국민들을 오도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다짐을 두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김 부총리는 “그 문제는 69년 회담 때부터 제기 되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무역역조계수엔 그런 것들이 들어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한일회담에선 으레 한국이 차관증액과 무역역조시정을 요구하고 일본은 경제개발을 위한 경협은 계속하되 차관은 일괄(一括)이 아니라 프로젝트별로 정하고 무역역조 개선은 시간을 갖고 공동노력하자고 응수하는 패턴이 반복됐다. 차관증액에 대해선 일본 부처 간의 입장이 약간 달랐는데 외무성은 동북아의 안정과 공동안보라는 인식에서 비교적 긍정적인데 비해 돈줄을 쥐고 있는 대장성은 매우 빡빡했다. 국내파 대장성의 입김이 강해 “국제정세를 잘 모르는 촌사람들 때문에 힘들다” 하는 외무성 실무자의 푸념을 들은 적이 있다.
1971년 회담에선 서울 지하철 8천만 달러, 선박차관 5천만 달러 외에 기계공업육성자금 명목으로 8천2백만 달러의 재정차관을 약속받았다. 기계공업 육성자금에 4대핵공장이 포함되었다.
각료회담이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일본기자들이 한국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군수산업을 시작하는 게 아니냐고 물고 늘어졌다. 김 부총리는 얼른 마이크를 잡더니 “한국은 군수산업을 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고 이번에 합의된 것도 모두 평화산업이다. 확대해석 하면 방직업도 군복을 짤 수 있으니 그것도 군수산업으로 볼 것이냐? 오늘날은 민생용이냐, 군수용이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우리가 조선소나 기계공업을 하려는 것은 산업발전을 한 단계 높이려는 것뿐이다” 하니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불치병 안고 불꽃같은 공직인생의 마감

동경서 회담을 할 때 김 부총리는 속이 안 좋아 고생을 했다. 그래도 회담 이틀째엔 새벽산보를 나갔다가 돌아와 실무자회의를 아침 6시40분에 소집하는 바람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속이 불편한 것은 오래전에 받은 위 수술의 후유증인 줄 알고 진통제로 달래며 회의를 마쳤는데 나중 알고 보니 이땐 이미 췌장암이 심각한 상태였다. 김 부총리는 귀국해서도 여전히 동분서주했다. 일에 대한 집념, 정열이나 독설도 여전했다. 박 대통령과의 사적인 만남도 계속 됐다. 이때 김 부총리는 공직 생활의 절정에 있었다. 취임 이래 전력투구하여 점화(點火)해 놓은 여러 사업들이 서서히 속도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종합제철, 석유화학산업, 4대강개발과 농업진흥, 고속도로망, 수출자유지역에다 마지막 과제인 4대핵공장 건설 등이 궤도를 잡아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또 전자산업도 막 싹이 터 궤도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70년대 들어 경공업 수출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전자공업에서 활로를 찾으려 했는데 71년 수출목표는 1억 달러였다. 이때 이미 가발수출이 연 1억 달러가 넘어 전자제품보다 많았다. 가발은 64년에 14만 달러 치를 수출하기 시작하여 한동안 수출 효자노릇을 했다. 처음엔 인모(人毛)를 원료로 쓰다가 일본에서 개발한 인조섬유를 써서 미국으로 대량수출하고 있었다. 미국에 처음 간 이민 1세대들이 가발행상을 많이 했다. 가발로 돈을 많이 번 기업들도 많아 이들이 전자 쪽으로 진출하려 했다. 전자제품은 막 초기단계여서 합작이나 직접투자에 의한 IC(집적회로) 트랜지스터 기억소자 등의 가공수출이 주류를 이루었다. 경북 구미(龜尾)에 전자공업단지가 만들어져 마쓰시다(松下), 소니, 도시바 등 일본 전자업체들이 막 진출하려 할 때였다. 전자는 60년대 후반 미국업체들이 일본보다 앞서 부품 소재 부문에 진출했다. 김포에 있던 페어차일드사의 반도체 소재공장을 기획원 기자실에서 견학 간 일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반도체가 뭔지도 몰랐고 다만 금줄(金絲)을 써서 현미경으로 작업을 하는 광경만 신기했다. 정갈하고 조용한 것이 공장이 아니라 실험실 같았다.
국내 산업은 활발한 기지개를 켜고 있었지만 닉슨쇼크(金胎換停止) 등 심각한 세계경제질서의 재편과 더불어 경제침체의 조짐도 다가오고 있었다. 김 부총리도 처음엔 경기후퇴를 부인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수습은 후임 경제팀장의 몫이 된다. 이때 본인이나 주위에선 잘 몰랐지만 김 부총리는 마지막 심신을 불태우며 불꽃같은 공직인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그 해 겨울 병세가 악화되어 김 부총리는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당시 췌장암은 불치병이었다. 박 대통령은 사직을 허가하지 않고 현직에 있으면서 치료를 받으라 했다. 연말 국회예산심의 때에도 병석에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국회에선 “국회예산심의 때 부총리가 안 나오다니, 앰뷸런스에 태워서라도 국회에 데리고 오라”고 소동이 나기도 했다. 김 부총리의 병세는 깊어만 갔다. 이듬해인 72년 정초 박 대통령은 치료하고 다시 일하라며 김 부총리의 사직을 수락하고 후임에 태완선(太完善) 건설장관을 임명했다. 2년 6개월에 걸친 폭풍 같은 김학렬 시대가 끝난 것이다. 이로써 기획원도 거인(巨人), 기인(奇人)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보통사람의 시대가 열렸다. 연재끝.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1962년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제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한 후 1995년부터 10년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필자는 1965년부터 71년까지 경제기획원을 출입하며 장기영, 박충훈, 김학렬 부총리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취재했다. 필자는 경제기획원 시절의 수기를 묵은 취재수첩과 관계기록, 신문스크랩 및 출입기자 시절의 보고 들은 내용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 형식의 사적 기록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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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9호 (2016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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