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무언이지만 이심전심이더라

'산 속에 사는 시인'
유구무언이지만 이심전심이더라
시인 후동(後童) 늙을수록 어린애처럼…
옛 언론인 진 옹의 생전부음 생각난다
▲ 포항에 위치한 운제산 속에 사는 ‘후동’ 시인의 산방. <사진@경제풍월>

‘산속에 사는 시인’이 자신을 후동(後童)이라 부른다. 늙어갈수록 아이들처럼 자연스럽게 살고 싶은 소망인 모양이다.
김장식이란 본명이 있지만 그냥 ‘후동’이라 자칭하니 “후동 시인 계시는지요”라고 물었다. “뉘요”라는 응답이 친근하기 짝이 없다. 산속에 오래 살다 보니 올해 일흔인데도 꼭 어린애 목소리 같다.

그냥 훌쩍 내려간 산방

[배병휴 발행인 @경제풍월] 경북 포항시 남구 대송면 산여리 58번지에서 시집 선농일지(禪農日誌)를 우송하면서 지은이 ‘후동’이라고 적었기에 궁금해서 전화로 인사했다.
“산속에 사는 시인 맞습니까. 그곳이 산속입니까”
“포항 내려 왔거든 차로 30분만 달려오소. 운제산에 들어오면 산방(山房)이 나올테니 그냥 오소. 더덕술과 녹차가 있으니 한 모금 드리리다”
후동 시인은 70년대 중반까지 서울 신림동에 살다가 “그냥 훌쩍 내려왔다”고 한다. 운제산 산수가 좋다기에 찾아갔더니 빈터가 있어 주저앉았다. 문명권과는 단절된 산중이었다. 전기가 안들어오니 TV가 없고 드라마도 없었다.
텃밭을 가꿔 더덕 심고 야채 길러 자연식 하는 재미가 생겼다. 온갖 민속주와 자연차도 즐길 수 있었다. 오가는 등산객이나 귀동냥으로 찾아오는 길손에게 쉼터를 제공하니 세상 소문도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이 좋아졌는지 10여 년 전부터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하니 사람 사는 냄새를 맡기 쉬워졌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과음이 탈났는지 당뇨가 생기면서 술을 끊었다. 질경이처럼 모질게 살면서 선농일지를 적었다. 일기체식 후동 시집이 이래서 나왔다.

살다보면 ‘산속에 사는 법’

후동 시인이 산여동 산골에 둥지를 튼 지는 올해로 22년째,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때로 거슬러 가면 27년째다.
산방의 독신생활이지만 아내가 아닌 여자와 동거한다. 아나뜨마(김문선)님과 한집에 살기 시작한 것이 20년이 넘었다. 후동의 수발을 드는 그녀는 제복을 입지 않은 성녀(聖女)다. 살다보니 후동이 아프다면 비행기 타고 서울서 내려오는 한의사 부부도 생기고 문인 지망생도 생기고 불교청년회와 죽림사 신도회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후동일지 속에 ‘산속에 사는 법’이 나와 있다.
세상에 별 사람 다 있네.
하늘 아래 똑같은 사람이라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용사동거’(龍蛇同居)라는 말 맞네.
못 마땅한 상대 마주치더라도
이기려 들거나 싸우지 말게.
시름에 휩쓸리면 산에 못 사네
대중이 모인 곳에 자주 나다니지 말고
외롭다 고립 같은 거 두려워서는 안되네

자연사랑, 생명 아끼며
하루 반나절 생산 일에 땀 흘려
먹고 사는 것 자립하게.

산중 삶은 유구무언, 이심전심

후동은 산중의 삶을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심전심으로 가슴에 닿는 것이 있다고 했다.
“삶과 자유란 원래 한통속이다. 자연이란 바로 자유에서 잉태된다”
‘비상약’편이 후동의 산중 삶을 잘 말해준다.
“산속에서는 아파도 약 안먹는다. 낫던가, 죽던가 둘 중의 하나다. 비상약으로 빨간약, 안티프라민하고 반창고 있다. 진통제와 게보린은 없다”
민간요법으로 “부스럼 생기면 자다 일어나 밤 침 바르고 풍치 잇몸 쑤시면 송진가루 묻히고 체하면 등 두드리고 바늘로 손끝 찔러 피내고 기침 심하면 더덕, 도라지 삶아 마시고 담에 걸리면 철남생이 삶아 먹는다”
우리네 어릴 적 삶이 그러했다.

외출하면 치과와 이발소 들려

산중 시인도 때론 외출하고 강단에 서서 설법도 한다.
“요행이 차 얻어 타고 안강 장에 나가 톱 갈고 치과 들리고 이발소 다녀왔다. 경주 가자고 해서 경노 우대권으로 4천700원짜리 버스에 타고 갔다”
부산예술대 박 교수가 학생 여럿 데리고 와서 하룻밤 자고 갔다. 짬나면 두어 시간 강의 부탁한다기에 ‘선과문학’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옛 임금님 오줌 누고 거시기 세 번 털었다”는 ‘옥근삼타’(玉根三打)를 우스개로 들려줬더니 학생들이 배꼽을 쥐고 웃었다.
“도(道)는 어디 있습니까. 
네 눈앞에 있느니라.
어찌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네라는 것이 있어서 볼 수 없느니라”
고명한 스님의 말씀을 전해줬다. 그리고는 시인 조지훈은 ‘지조론’에서 시와 선은 매 한가지라고 지적했더라고 들려줬다.
후동은 그가 선과 문학에 관해 강좌 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방방곡곡 사찰에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몰려왔다.
“후동이 이 새끼, 꼭대기에 젖내도 안 마른 꼴뚜기 주제에 언감생심 선(禪)이 어쩌고 도(道)가 어쩌고 거기다가 시(詩)가 어쩌고 촐랑이 주둥일 놀릴 테야”
그러나 후동은 꿈쩍하지 않았다.
“허허 내가 누구냐. 만고풍상 다 겪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룬 터, 누구 우쭐해지라고 꼬랑지 내릴까봐”
‘마카 다 포항 오이소’

후동의 일기체 산중 시가 여름 휴가철 포항 해수욕장으로 유혹한다.
“한반도 지도 호랑이 꼬랑지에 붙은 해맞이 땅이 우리 포항 아닌기요. 아재요, 올 여름 피서는 포항으로 오이소, 아지매하고 히야하고 꼬맹이들 데리고 마카 다 오이소. 
청정해역 갓 건져 올린 활어회에 소주 한잔 꺾는 맛에 더윈들 어디 끼어들 틈새 있겠는기요. 진짜배기 포항 맛 선보여 주겠니이더. 신세는 무슨 신세기요. 여기 인심 뭘로 알고 속 시끄럽게 그런 말 자꾸 하는기요”

‘미리 적어 두는 유언’

후동은 원래 시인이지만 아내 잃고 산속에 사는 시인이 되었다.
시집 ‘산여동’으로 문단에 나와 한국문인협회 회원, 부산광역시 문인협 회원, 이색문학동인으로 활약한다.
시집으로 산여동 외에 꽃불의 시, 판때기 이빨에 털 난 소식, 횡설수설…, 뿔 없는 도깨비와 뿔 아홉 도깨비, ‘산이 말을 하네’ 등을 발표했다.
사진 대신에 이욱상 그림으로 나타낸 후동의 얼굴은 무심(無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후동의 속마음은 ‘미리 적어 두는 유언’에 너무나 진솔하게 나타나 있다.
“오래도록 신세 지고 갑니다. 부탁드리오니 이사람 죽거들랑 매장 대신 화장해 주십시오. 나무 밑에 묻던지 뿌려주십시오”
후동은 분묘가 작고 크고 간에 곧 금수강산이 묘지로 덥힐까 걱정이다. 화장해서 납골당으로 가던가, 수목장으로 가는 것이 좋은 방식이라고 일러준다. 산중에 사는 시인이 죽어서도 산에 살고 싶어 한다.

언론인 진학문 옹의 생전부고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1974년 2월 여든살의 언론인 진학문(秦學文)씨가 자신의 부음(訃音)을 미리 작성해 놓았다가 타계한 후 동아일보 광고란에 부음이 그대로 실린 적이 있었다.
“그동안 많은 총애 받았사옵고 또 적지 아니한 폐를 끼쳤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먼저 갑니다. 여러분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일제하의 조선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 명성을 날린 진학문 옹은 일본 여인과 결혼 외딸 진기(秦寄)양을 두었지만 브라질 이민 가서 주사 잘못 맞아 요절하여 혈육 한 점 남기지 못하고 홀로 떠나갔다.
그래서 사후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자신의 부음을 미리 작성해 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진씨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마지막 직장이던 전경련 직원들이 관을 메고 상제노릇을 했다는 기록이 전경련 조사부장 출신 윤능선(尹能善) 회장의 ‘경제단체 인생 40년’에 나온다.

민족계 언론인의 만주국 벼슬

윤능선 회장은 진학문 옹 생전에 무교동 술집 등에서 고인의 젊은 시절에 관한 회고담을 자주 들었다.
진 옹은 1894년 서울서 태어나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와 동경 외국어대 러시아어 학과를 나온 최고 인텔리로 사회에 진출했다. 처음 아사히신문기자로 출발하여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 춘원 이광수와 함께 참여하여 논설위원으로 활약했고 1924년에는 다시 춘원과 함께 시대일보를 창간, 편집국장을 역임한 선구적 언론인이었다.
진 옹이 아사히신문을 떠나 귀국한 것은 3·1운동 후 사이또 총독의 문화정책에 따라 민족지가 창간됐기 때문이었다. 유명 언론인으로 세계여행 중에 인도의 시성 타고르를 만나고 뒷날 만주국 시대에는 나치스의 히틀러도 만나며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그렇지만 언론탄압에 저항하여 상해와 만주로 망명해야 하는 피압박 민족의 서러움도 많이 겪었다.
문제는 1936년 만주국 국무원 참사관(장관급)으로 뒤늦게 일제에 협력한 친일 전력 때문에 해방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없었다. 그의 노후 삶이 파란만장하고 혈육 한 점 없이 쓸쓸히 타계하면서 자신의 부음을 미리 작성해야 했던 서글픈 이야기가 여기서 나온다.

혈육 한 점 없이 쓸쓸히 타계

일제가 패망하자 진 옹은 되도록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타향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외딸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 갔다. 그곳에서 딸이 요절하자 남은 것은 좌절 뿐이었다.

▲ ‘후동’ 시인 일러스트

하는 수 없이 귀국하여 은둔하고 있을 때인 1963년 전경련 김용완 회장 시절,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아끼는 주변 인사들의 설득과 권유로 초대 전경련 상임부회장으로 영입되어 노후를 보낼 수 있었다.
전경련 시절 진 옹은 윤능선 조사부장과 함께 옛 기생이 차린 청진동 뒷골목 술집에서 일제시대를 살아온 과거를 자주 회상했다. 민족지 동아일보 창간 시절과 총독부와의 마찰, 망명 다니다가 만주국에 참여한 일 등등 숱한 회한을 털어 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술기운이 오르면 “여보 마누라, 뒤뜰에 뛰어 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라는 노래를 쓸쓸히 불렀다고 한다.
후동 시인의 ‘미리 적어 두는 유언’이 진 옹의 생전부음을 생각나게 하여 윤 회장의 경제단체 인생 40년을 다시 뒤적여 인용한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90호(200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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