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경제풍월에 실린 김동길 교수의 '이게 뭡니까; 칼럼. (사진=경제풍월DB)
월간지 경제풍월에 실린 김동길 교수의 '이게 뭡니까; 칼럼. (사진=경제풍월DB)

[김동길 교수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오래 전에 가수 남인수가 ‘가거라 38선’을 구슬프게 불렀다. (이 노래 2절 가사… 꽃필 때나 오시려나, 보따리 등에 메고 함께 울고 넘었지. 자유여 너를 위해, 자유의 너를 위해 이 목숨 바친다)

열아홉 살 ‘반동분자’의 야밤 탈북


내가(김동길) 38선을 넘어온 것은 62년 전, 열아홉 ‘반동’ 소년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평양역에서 기차 타고 원산 가서 여관방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일찍 철원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은 38선 넘어 남한으로 가려는 ‘반동분자’들로 붐볐다.

철원에서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려 안내자 따라 어두운 밤을 어머님 손잡고 남쪽으로 향했다. 38선 경비 담당 로스케(소련군)나 적위대(김일성군)에 발각되면 끝장이다. 그래서 숨죽이고 넘던 38선, 그날 무더운 6월의 어두운 밤을 흔드는 것은 논바닥 개구리들의 합창소리 뿐, 공포와 긴장의 몇 시간을 지나서야 먼동이 트고 우리 일행은 경기도 연천에 도착했다.

이제 살았다. 이남의 경찰도 결코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김일성 천하에서 탈출해온 감격과 흥분으로 남한에서의 첫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당시 남한의 좌우익 충돌 무질서는 극단이었다. 3.1절 기념도 남산과 서울운동장에서 각자 따로 가졌다. 5.10 총선거도 유엔 감시 하에 치러졌지만 북측이 끝까지 반대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다.

얼마 뒤 김일성이 스탈린을 믿고 남침하니 6.25였다. 사전 준비가 없었던 국군은 후퇴 밖에 없었고, 서울은 3일 만에 인민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때 미군과 유엔 깃발 아래 16개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 동포들은 어찌됐을까. 지금 김일성 3대에게 시달리며 아직도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인민들과 다를 것이 있겠는가.

DJ, 노무현은 ‘잘못된 지도자’ 거듭 확신


한평생 나는 역사를 공부했지만 ‘역사의 주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지 않고 자유라고 대답한다. DJ와 노무현의 잘못된 정권 하에서 10년간 내가 밤낮으로 염려한 한 가지 사실은 “대한민국이 온갖 역경을 다 이겨가면서 이만한 자유의 터전을 마련했는데 이걸 잃거나 뺏기면 어쩌나”였다.

DJ와 노 씨는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나는 분명 그들이 적화통일의 길을 열어준 ‘잘못된 지도자’라고 어제도 믿고 오늘도 믿고 있다. 우리는 자유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이들은 햇볕정책이니 포용정책이라는 정체불명의 깃발을 내걸고 피땀 흘려 얻어놓은 우리들의 자유를 빼앗으려 하는지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과 자유를 소망하는 염원을 더 이상 말해서 뭣하랴.

199년 9월호(1호 창간) 표지.
199년 9월호(1호 창간) 표지.

마음대로 쓸 수 있던 ‘경제풍월이여’ 안녕


지난 여러 해 동안 나는 매달 경제풍월에 글을 보냈다. 어둡고 괴롭던 기나긴 세월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노는 한심한 인간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잘못된 짓만 골라서 했다.

나라의 경제는 엉망이 되고 반미, 친북이라는 망국적 구호 때문에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의 고아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가적 위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위기 속에 경제풍월이 탄생했다.

정권 차원에서 언론통제가 극심할 때 이 잡지가 태어났으니 ‘죽을 고생을 하기 위해 태어난 아기’였다. 영아, 유아의 사망률이 높듯, 신생 잡지가 ‘6번 내고 1년 버티는 경우’도 드물 때 ‘경제풍월’이 살아남았다.

경제풍월 첫 장에 실린 내 글을 읽었다는 사람이 많았다. 재정난이 얼마나 심한지 어느 달부터는 “원고료는 주지 못하지만 계속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매달 쓰고 또 써서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잡지는 ‘경제풍월’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배병휴 선생에게 경의를 표한다. 내가 이번 3월호 글을 마지막으로 ‘경제풍월’에게 작별의 인사를 고한다. 아마 일방적인 통고에 배 선생은 펄쩍 뛸 것이다. 의논도 없이 나 혼자 정한 일이다. 나는 더 이상 ‘풍운아’같은 이 잡지에 글을 쓸 이유가 없다.

경제풍월은 창간호부터 정권의 잘못된 행보를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아마도 한나라당 압승과 이명박 17대 대통령 취임이 경제풍월의 열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상상도 못할 협박, 공갈, 권고, 회유를 다 물리친 ‘깡마른 지독한 사나이’ 배병휴는 끝까지 싸워 이긴 것이다. 그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경제풍월의 앞날은 창창할 것이다.

경제풍월, 나의 글은 ‘때가 지났다’


나는 누가 뭐래도 이번 호에 기고하고 붓을 놓는다. 내가 10년 전에 속칭 ‘3김 낙시론’으로 YS와 DJ에게 물러가라고 한 말의 원제목은 “나의 때는 이미 지났다”였다. 나는 그때 학생소요 와중에서 임기가 남은 하버드 네이턴 퓨지 총장이 남긴 말을 인용한 셈이다.

퓨지 총장이 남긴 말, ‘나의 때는 지나갔다’가 경제풍월에서 나의 때가 지나간 것으로 적용한 것이다. 앞으로 MB 정권이 잘못한 일들을 누군가 비판해야겠지만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17대 대통령이 취임하고 3일 뒤에는 5년간 강행한 ‘목요강좌’의 마지막 강연을 했다. 꼭 60회째 강연이니 감개무량이다.

경제풍월 독자들에게 ‘안녕’ 한마디와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여러분들의 공감과 격려가 있었기에 경제풍월 권두언에 오래 실렸다. 그동안 경제풍월을 통해 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나의 주장에 더욱 큰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경제풍월 독자들과 함께 나의 조국 대한민국 민주주의 실현의 동역가로서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국보 제1호, 숭례문이 얼빠진 한 노인의 방화로 소실됐다. 이에 냉정하게 대처하길 바란다. 600년의 문화재, 국보, 임란과 병란에도 무사했고 6.25 폭격이나 5.16 쿠데타에도 끄떡없었던 문화재다. 다행히 복원이 불가능하지 않다니 3년쯤 지나고 200억 원쯤 들이면 된다니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본다.

남대문을 개방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화재의 책임이라는 일부의 말은 단지 정치적으로 밉다는 소리이니 말도 안 된다고 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서로 돕고 서로 힘을 합해 결실을 맺는 정치철학임을 밝히면서 경제풍월에 대한 내 붓을 내려놓는다. (2008.3 ㈜경제풍월 25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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