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연말이 가까우니 연초에 본 인터넷 사주가 올 한 해 들어맞았는지 복기해 본다. 그러다보니 관상으로 생각이 뻗어나고 마흔이 넘으면 그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도 불쑥 떠오르면서 얼굴에 책임질 만큼 잘 살았는지 반성도 하게 된다. 그런 생각 끝에 자연스레 올 초에 있던 일이 새삼 의미 있게 떠오른다.

영화
영화 "자토이치(座頭市: Zatoichi, 2003)"에 주인공 자토이치 역의 기타노 다케시

딱, 이런 일 하는 사람?


올해 초, 자동차 내장 부품을 주력으로 하는 중소기업에서 홍보 영상 제작 의뢰가 들어와 울산 고연 공단에 있는 본사를 찾아갔다. 회의실에 앉아 명함을 주고받자마자 담당 이사가 “딱 봐도, 이런 일 하는 사람들 같으시네요.”하며 입을 뗐다. 그날 우리의 차림새 어디를 봐서 그래 보였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감독은 180이 넘는 키에 씨름 선수 같은 다부진 체격이다. 파마머리에 얼핏 강호동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배우 송강호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아직 추위가 미적대던 2월이었던지라 직장인들이 잘 입고 다니는 파일럿 코트를 입고 있었고, 인터넷에서 두 개를 샀다는 카키색 면바지를 입었다.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처럼 빼빼 마른 카피라이터는, 농담처럼 말하면 늘 사람들이 박수치며 공감하는, 일본의 초밥 장인이나 <자토이치>에 나온 기타노 다케시처럼 짧은 머리칼이 희다. 또 11월부터 3월까지는 같은 디자인의 색만 다른 외투 네 벌을 번갈아 입고, 그 안에는 역시 색만 다른 터틀넥을 예닐곱 개 정도 번갈아 받쳐 입는다. 눈은 퀭하고, 눈썹은 좋게 말해 백미(白眉)지 허옇게 서리가 내렸다. 그날처럼 검은색 마스크까지 쓰면 솔직히 낮이든 밤이든 마주치고 싶지 않은 외모다. 이런 우리의 어디를 봐서 그리 보인 걸까?

'삶'이 '태'를 만드는 건가


한 십여 년 전까진 제법 머리가 치렁거렸다. 그런 행색일 땐 옹기 마을이 있는 울산에선 도예가로, 부산에선 미술가나 작가로 오해 받곤 했다. 이렇게 사람의 생김새로 그 사람의 직업이나 인생, 성격을 가늠하는 건 때론 맞고, 때론 틀리다. 생김새는 일종의 형태다. 형태는 꼴이라 표현할 수 있는데, 그 삶이 꼴을 만드는지 꼴이 삶을 만드는지, 그 순서에 대해선 여전히 혼란스럽다. 삶이 태(態)로 나오는 건지 그런 태가 그러한 삶을 살게 하는 건지, 예정 된 쓰임새에 맞게 빚어져 세상에 나온 건지 살다보니 그 쓰임새에 맞춰져서 그러한 모양새가 된 건지 그 전후를 분간키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업마다 그 고유의 태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고 그 태는 의외로 오래전부터 형성되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 직업에 걸 맞는 태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농부의 굽은 등, 어부의 그을린 얼굴은 육체노동의 일상이 빚어낸 것이다. 그러나 몸을 쓰지 않는 일을 하는 목사님, 스님, 신부님, 수녀님 또한 왠지 떠오르는 체형이나 분위기가 있다. 당연히 목사님 체형 만들기 운동 프로그램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내가 아는 한 어느 학교 신학과에도 “목사님 스타일 만들기.”같은 과목도 없다. 신학생 기숙사와 붙어 있던 기숙사를 썼던 대학 시절을 떠올려 보면, 아마도 신학생일 때부터 전도사라고 불리며 신과 성도, 교회라는 시선 앞에 놓여 진 사람으로서 다른 청춘이나 일반 대학생과는 구별 된 몸가짐, 행동 가짐을 하다보니까 체형도 그렇게 된 건 아닌지 싶다. 그렇다면 일을 포함한 모든 삶의 방식이 그에 맞는 몸을 빚어낸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몸의 태(態)는 쓰는 데로 만들어지고, 살아온 데로 빚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몸은 일과 사회적 쓸모를 위해 형성 되고 결국엔 그 유용성을 위해 하나의 상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몸은 내 정신을 담아두고, 심지어 표현하는 그릇이자 포장의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육필, 육성, 필체, 손맛이란 게 뭐겠는가? 반복 된 몸놀림이 만들어낸, 그 사람의 삶과 내면을 판단하고 가늠할만한 외적인 결과물 중 하나 아니겠나?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물론 이 외적인 결과물이나 생김새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선입견에 빠지기 십상이다. 특히 그 경험한 세월의 깊이와 경험의 폭이 넓지 않으면 더 그러하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고, 그 보이는 것의 본질은 아니다.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는 많다. 주로 견(見)자를 써서 나타내는 데 식견, 편견, 선입견이라는 단어들이 그 예다. 이 견자의 눈 목 자 밑에 있는 건 책상을 의미한다. 시선(視線)이라는 표현도 있다. 이때 볼 시는 볼 견자에 보일시가 붙는다. 둘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앞에 견은 사물이 내게 보여 진다는 의미다. 반면 시는 내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가만히 본다는 의미다. 재미있는 건, 보는 행위에 생각이 담길 때 주로 견자를 쓴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우린 현상이나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자신만의 세계관, 시각이 있다. 세계관(世界觀)의 관(觀)도 본다는 의미다. 관은 관세음보살, 관음 등에도 쓰이는, 본다는 단어 중 제일 묵직한 의미를 담고 있다.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한자에서 보듯이 우리의 눈은 세상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그 시선은 내부에 구성 된 견고한 내적 세계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견고한 신념 체계를 설득 커뮤니케이션에선 태도라고 부른다. 태도라는 말은 광고업계와 학계에서 많이 쓰이는데, 설득의 목적이 이 태도를 강화하거나 바꾸는 것이고 광고는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최전선에 있으니 많이 쓰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대체로 소비자는 태도를 잘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하는 쪽으로 메시지를 선호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생각과 태도가 틀렸다고 밝혀져도 그걸 부정하고 자신의 생각과 태도가 옳다고 부추겨주는 정보를 추구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태도가 이리 무섭다.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지 않고, 신제품도 내 생각에 맞춰 판단하고, 새로운 사람과 사랑도 어느덧 내 스타일로 바꾼다. 그래서 정작 그 어떤 것도 새롭지 않게 만드는 마성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태도다.

'덕'을 쌓아야 '체상'도 좋다


그러니 나를 척 보고 어떤 한 분야나 직업을 오래한 사람으로 판단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십 년 가까이 한 가지 일을 해 온 사람의 모양새가 그리 보이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거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든다. 경력이 모양새를 만들어 명함 노릇을 한다면 이 또한 나쁘지 않다는 마음도 든다는 것이다.

불교에 체상이라는 말이 있다. 자성(自性)이라고도 하는데 불교 용어 사전에서 풀이하길 본체(本體)의 모습이라 운을 떼고, 본질에 의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모양을 상(相)이라 설명한다. 체(體)는 하나이나 상(相)은 하나가 아니고, 체는 절대적이나 상은 상대적이며, 체는 무한이고 상은 유한하다고 이어 설명한다. 역술 분야에서도 체상을 관상만큼 중요하게 보는 모양이다. 김구 선생님이 평생 잊지 않았다는 마의상서에 나오는 구절도 체상을 포함해 여러 상을 말하고 있다. 相好不如身好(상호불여신호), 身好不如心好(신호불여심호), 心好不如德好(심호불여덕호)라는 문구다. 요즘 말로 번역하면 “관상보다는 체상이고, 체상보다는 심상이며, 심상보다는 덕상이다.” 하고 말할 수 있겠다. 김구 선생님이 과거 시험에 낙방한 후 관상학을 공부하며 당신 얼굴을 뜯어보니 복 있는 데가 한군데도 없어 낙담했다고 한다. 그 때 읽은 구절이 바로 이 구절이라고 한다. 그 후 “나는 상 좋은 사람(好相人)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돼야겠다.”고 다짐하셨다 한다.

불교의 체상이든, 역술의 체상이든 상(相)은 그저 잠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 상을 오래 유지하여 덕이 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일상이 되려면 김구 선생님의 말씀처럼 좋은 마음을 유지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이를 잘 먹는 다는 건, 남자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겠나. 날 작가나 카피라이터라 부르고 그리 보인다는 낯선 이의 말 속에서 그 업을 가진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무겁게 느껴진다. 이 업을 이십년 가까이 한 사람의 책임감도 느껴진다. 세월과 경력이 만들어준 모양새에 걸맞게, 그 꼴값을 하고 사는지 반성하게 되는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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