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수 년 전에 수저 계급론, 그러니까 흙수저, 금수저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주제로 한 지역 공동체의 대담에 패널로 참석한 적이 있다. 그 후 수저 계급론은 요 근래 조국 자녀의 아빠 찬스 논란을 거쳐 오며, 젊은 세대 내부에 더 견고한 계급과 편 가름의 성벽에 주춧돌 노릇을 한듯하다.

그렇게 차곡차곡 두껍고 높아진 성벽은 그 수가 더 다양하고 복잡해져서 요즘 서점에는 어떤 주의와 주장을 담은 책과 그것에 반대하고 비판하는 책들이 대치하고 있다. 전염병이 이런 담 쌓기와 편 가르기의 원인은 아닐 것이다.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꽤 오래 전부터 편을 갈라 싸워왔다. 아니 편 가름을 원했다. 김훈 선생님의 책 제목을 빌려 말하자면 너는 어는 쪽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난 이쪽이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그리 불리어지고 그리 보이기를 원해 왔다.

앨리스 헌트 역의 시고니 위버와 에드워드 월커 역의 윌리엄 허트
앨리스 헌트 역의 시고니 위버와 에드워드 월커 역의 윌리엄 허트

냉전의 유지와 타자의 괴물화


냉전시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진영과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서로를 괴물로 만드는데 여념이 없었다. 수많은 대중문화, 특히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들은 공산주의 국가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포장했고,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미국과 서방 국가와 그 지도자들을 제국주의자, 노동자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로 묘사했다. 이런 묘사는 냉전의 벽을 더 높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소련은 철의 장벽이었고, 중국은 죽의 장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벽은 영화 <빌리지>의 벽과 닮았다.

<빌리지>에서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담을 쌓고, 그 담 안의 공동체 유지를 위해 담 근처 숲에는 무서운 괴물이 산다는 공포 괴담을 만들어 공동체 구성원의 이탈을 막아냈다. 안의 괴물은 가상의 괴물이었고, 밖의 괴물은 과거의 경험으로 만들어 놓은 불안과 공포였다.

냉전도 혁명과 전쟁이라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담을 쌓았다. 누군가 그 담을 넘어가려면 엄청난 괴물-사상적 반동, 억류, 자유의 구속-이 버티고 있는 공포의 숲을 통과해야 했다. 그것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과장이었고, 과장을 위한 사실의 선택이었다. 이 긴 시간동안 양 진영은 서로를 혐오하는 법을 가르치고 배웠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유동하는 공포>에서 썼던 표현을 빌리면 이런 공포는 2차적 공포, 파생적 공포다. 2차적 공포는 “그런 위협과 직접 마주쳤던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침전물”이다. 이 파생적 공포는 “계속해서 마음을 구획하는 프레임”의 역할을 한다. 이 프레임의 견고한 구축을 위해 우린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았다. 공중파 방송에선 <전우>, <3840유격대> 같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을 방영 했었고, <똘이 장군> 같은 만화에선 북한 군인과 김일성을 멧돼지 같은 괴물로 묘사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북한과 그 정권에 대해 공포와 혐오감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1992년 소련의 해체 때까지 이 담 쌓기는 계속 됐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빌리지(The Village, 2004)"에서 노아 퍼시 역할을 맡았던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 스틸컷.

사적 냉전 시대의 그늘


이제 장벽은 사라지나 했다. 그런데 이제 개인 간의 장벽이 더 높아졌다. 인터넷을 비롯한 소통의 기술과 그 도구는 진보하고 다양해지는데 담은 더 높아졌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전문가들마다 말이 많다. 어떤 이는 신자유주의 탓을 하고, 어떤 이는 발달 된 인터넷과 스마트 폰, SNS 탓도 하고, 정규직과 계약직 등 세분화 되고 차별화 된 노동 시장 탓을 하기도 한다.

그 원인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이런 시대, 혐오와 공포의 시대를 다시 살아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서로를 외면하는 걸 넘어서서 오직 자기 길만을 가는 성과 주체들이 넘쳐나는 시대,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타자(他者)를 혐오하고 그 타자가 격리되길 원하는 시대, 혐오하지 않던 타자조차 혐오 받아 마땅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시대. 이 시대는 개인이 개인을 적으로 대하는 사적 냉전 시대인지도 모른다.

이 새로운 냉전시대의 승리를 위해 개인들은 넷 상에서 끝없는 연대를 추구하지만 그것이 어느 편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이기에 그 연대엔 깊이가 없다. 접시에 담긴 물처럼 작은 진동에도 요동치며 찰랑거린다. 이 찰랑거림에선 내 편과 네 편이 끝없이 유동하기에 피아 식별을 위한 정보 탐색을 멈출 수 없다. 그 정보는 타자를 가깝게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확실히 구별해 내기 위해 쓰인다. 이 구별은 혐오의 대상을 멀리 떨어트리고 격리시키는 전제로 사용된다.

이 격리를 위한 정보 확인과 이로 인한 타자의 분리수거는 전선(戰線)의 끝없는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 확장은 백인 중심의 나라에선 인종 차별과 그에 반발하는 테러나 소위 묻지 마 폭력으로도 나타난다. 타자를 향한 혐오는 주체의 공포와 고통을 잊게 하는 상징적 행위다. 어디까지나 상징적이다. 타자를 아무리 혐오해도 우리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는다. 내 고통은 그대로 있고 타자의 고통만 증가할 뿐이다. 그러니 사회 전체의 고통은 오히려 증가한다. 어찌 보면 자학적이고 가학적이다. 난 그대로인데 나보다 더 괴로운 타자를 생산함으로써 상대적 위안을 받는 이런 현상은 국가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낭비다. 우리의 세금이 타자의 고통,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어떤 형태로든 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벽을 극복하는 방법, 관용과 똘레랑스


50여 년 전에 이 혐오의 벽이 무한히 늘어만 가는 혐오의 시대를 예견한 이가 있다. 미셀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실린 1976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 한 강연에서 “우리는 서로서로의 전쟁 상태 속에 있다. 전선은 지속적․영구적으로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우리 각자를 한 진영 또는 다른 진영에 위치시키는 것은 바로 이 전선이다. 중립적인 주체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모두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내부의 적에게 이기기 위해 서로를 파헤친다. 서로의 선명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더 극단적인 표현을 하고, 가상의 광장에서 세를 불린다. 발언자의 실체가 불분명한 프로파간다로 선동하고 그 선동 속에서 내부는 결속 되고 외부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은 그 성격이 더 진해진다. 이제는 혐오와 경계심으로 형성 된 사적 냉전의 벽을 허무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관용(寬容)과 영어의 tolerance, 불어의 똘레랑스의 의미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한 사회, 공동체, 개인이 낯선 타자를 그 개인, 사회, 공동체의 이해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냥 그 다름 자체를 받아들이는 거. 이것을 관용이라 할 수 있다. 한 사회, 개인, 공동체가 관용적이라는 건 구성원과 공동체가 다양해지면서 그 다름의 스펙트럼이 아무리 많아져도 갈등이 일어나지 않게 내적으로 버티고 견뎌주는 힘인 것이다. 그래서 "야, 이건만큼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하면 그 사회의 관용은 거기까지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견디기 위해서는 그 다름을 너무 찬찬히 관찰하거나 샅샅이 알려는 노력이 없어야 한다. 한자의 뜻 그대로 관용(寬容), 즉 멀리 거리를 두고 타자를 봐야 한다. 신뢰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오지 않는 상대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신뢰는 사회학자 제임스 콜만(James Coleman)이나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등이 말했던 사회적 자본이 되어 이 성벽의 높이를 낮추고 궁극적으로 허물 것이다.

덧붙여 이 1차 세계대전의 지루하고 참혹했던 참호전 같은 대치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을 레비나스의 말에서 더 찾아보자. 그는 <시간과 타자> 첫머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시간은 주체가 홀로 외롭게 경험하는 사실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자체임을.", 그리고 몇 페이지 지나 이런 말을 덧붙인다. "자아는 자기 자신에 의해 방해 받는 다는 것, 그리하여 유물론자의 물질성과 내재의 고독에 사로잡힌다는 것, 노동과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짐을 짊어진다는 것."이라고. 이 레비나스의 문장을 이전에 썼던 칼럼에서 말했던 연민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지 않을까? <설국열차>에서처럼 앞 칸으로 가 봤자 어차피 기차 안이고, <빌리지>처럼 높이 담을 쌓아 봤자 지구를 벗어나 살 수 없는, 인생사 희로애락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임을, 그 존재의 동일함을 인식하고 살면 이 혐오의 전선은 해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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