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태 교수, "누가 저 학생 말 통역 좀…"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1959년 봄, 대학 입학으로 서울 왔지만 오나가나 말이 안 통해 고생스럽고 부끄러웠다. 당시 시내버스 차장은 억센 청년이 맡아 “고려대학, 종암동 가요”라고 외쳐댔지만 그 말이 들리지 않아 버스가 오면 앞 유리창 쪽으로 달려가 행선지 간판을 읽고 탑승해야만 했다.

대학 1학년 교양 영어 담당 변영태 교수님은 이승만 정부 외교부 장관에다 가방에 쇠붙이 아령을 넣고 다니다가 웃통 벗고 운동하는 교수님으로 너무 유명했다. 변 교수님 강의는 먼저 학생을 지명, 교재를 읽게 한 다음 몇 가지 일문일답식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필자가 지명되어 교재를 읽은 후 교수님 질문에 악센트 높은 고향 사투리로 답변을 했더니 갑자기 웃음판이 빚어졌다.

1954년 7월 3일, 변영태 국무총리 취임식. (사진=국가기록원)
1954년 7월 3일, 변영태 국무총리 취임식. (사진=국가기록원)

교수님께서 사투리를 못 알아듣겠다면서 “누가 저 학생 말을 통역 좀 해달라”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우스운 장면인가. 그날로부터 나는 학과 내 경상도 출신과는 담을 쌓고 서울 표준말과 어울리기로 작심했다. 콧대 높게 거들먹거리는 서울 출신들과 함께 여의도 ‘땅콩밭 서리’ 같이 가고, 홍제동 화장터 앞 계곡 물고기잡이도 다녔다.

그렇지만 서울 표준말이 좀처럼 익혀지지 않았다. 경상도 사람들이 내 말을 들으면 ‘죽도 밥도 아닌’ ‘고약한 범벅’이라고 핀잔했다.

이 무렵 제기동 하숙집 황 씨 아주머님, 종암아파트 가동 19호 가정교사 집의 이화여대 나오신 교양 아주머님께서도 종종 “배 선생님 말은 너무 빠르고 억양이 높아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얼굴이 홍당무 되는 순간들 이야기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고 애매하게 경상도 사투리가 유죄(?)로 취급되던 ‘세월의 형벌’ 쯤으로 회상된다. 아울러 그때 그 시절이야 ‘젊은 날의 추억’ 한 토막일 뿐이다.

사투리 지적하면 "방송 그만 집어치울래요"


신문기자 하다가 방송에 출연한 것은 일종의 외도(外道)였다. 신문사에 공채 1기생으로 입사했지만 신문기자의 꽃으로 불린 편집국장과는 인연이 없었다. 입사 동기생들이 국장 마치고 후배들이 국장을 할 때 논설위원이란 외곽 한직으로 밀려난 꼴이었다.

이때 정부와 경제단체 토론회 등을 열심히 쫓아다니다가 방송 출연과 인연이 닿았다.
MBC의 ‘9시에 만납시다’에서부터 각종 교양프로에 이어 매주 일요일 밤의 ‘현장 인터뷰 이 사람’ 인터뷰어로 출연했다. KBS는 2TV의 ‘경영작전’으로부터 ‘전국은 지금’, 조간 뉴스쇼 고정출연에 이어 1TV의 심야 토론 단골 출연으로 ‘외도바람’을 피워댔다.
이때 가장 큰 장애가 ‘경상도 사투리’로 방송사고도 나고 비난도 받았다. 방송내용 관련 비난보다 극찬 평가가 몇 배가 많았다고 들었다.

다만 토론 프로에서 흥분하여 공격형으로 상대방을 치고 나갈 때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쏟아져 너무 불안하다”면서 PD가 제발 조심 좀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고분고분 응답하기보다 “방송 그만 집어치울래요”라고 반발한 성미였다.

노태우 정부의 ‘토지 공개념’ 논란과 ‘토지 초과이득세’ 입법 과정 때 겁 없이 덤비다가 말썽이 빚어졌다. ‘토초세’법은 땅값이 전국 평균보다 너무 높게 오른 지역의 ‘초과이득’을 미리 세금으로 징수하겠다는 법안이다. 이는 토지 공개념에 바탕을 두고 땅값을 물리적으로 진압하겠다는 일종의 ‘융단폭격’ 성격이었다

이에 관해 경제이론가들도 말조심했지만 경제 기자로서 건설업계 동향을 듣고 용감하게 지지 선언하고 나섰다. 주택건설업계 등에서는 “땅값이나 투기세력과의 전쟁 선포 아니고는 경제안정 희망이 없다”고 주장했다. 노태우 정부는 주택 200만 호 건설과 함께 ‘토초세’ 입법에 운명을 걸고 있었다. (배병휴 기자 회교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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