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 2006) 스틸컷.
영화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 2006) 스틸컷.

[최영훈 칼럼 @이코노미톡뉴스] 얼마 전까진 향수를 쓰지 않았다. 향수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쩌다보니 그렇게 살게 됐다. 물론 향수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너도 대학에 갔으니 향수라도 좀 뿌리고 다니라며 어머니가 선물해 주신 적도 있고, 연인한테 선물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향수를 쓰기 시작한 건 아내가 향수를 사준 이후부터다.

내 주변에서 향수를 꾸준히 쓰는 사람은 오직 딸의 수학 학습지 선생님뿐이다. 덕분에 향이 없는 집에 짙은 향수를 쓰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 사람의 향이 공간을 차지한다는 걸 알았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십 분여의 수업을 마치고 가고 나면 창을 열고 환기를 해야만 했다. 나중엔 그 향에 적응이 됐고 다행히 선생님도 지난 5년간 향수를 바꾸지 않았다. 그 사이에 자동차는 소형에서 중형으로 업그레이드 한 선생님이 향수를 안 바꾼 이유는 뭘까? 향수는 자동차보다 더 바꾸기 힘든 걸까? 향수의 역할이 도대체 뭐기에 그럴까? 이런저런 궁금증 끝에 이 영화가 떠올랐다.

'향수'의 의미


영화 <향수>가 나오기 전부터 파트릭 쥐스킨트의 팬이었다. <좀머씨 이야기>,<비둘기>,<콘트라베이스>,<깊이에의 강요>등을 서른 전에 읽었다. 많은 책을 팔고 버리는 와중에도 아직도 갖고 있을 정도로 아끼는 작품들이다. 영화와 소설 <향수>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악취가 진동하는 생선 쓰레기 더미에서 인생을 시작한 주인공 그르느이에겐 체취가 없다. 이런 사람이 천재적인 향수 만드는 재주를 밑천 삼아 프랑스 각계각층 인간 군상 속에서 삶을 연명해 간다. 그러다 가장 완성하고 싶은 향수를 가진 사람을 만났고 그 향수를 만들기 위해 연쇄 살인마가 된다. 거칠고 간략하게 말하면 그런 이야기다.

영화포스터  (사진=국가기록원)
영화포스터  (사진=국가기록원)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땐 체취가 없는 사람이 향수를 잘 만들며 살다가 갑자기 하나의 특별한 향수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해 못했다. 그저 그로테스크한 소설 정도로만 이해했고 한참 후에 제작 된 영화도 그렇게 봤다. 이 소설과 영화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건 몇 년 전 문화기획을 하는 후배와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할 때였다. 콘텐츠 소재가 후배가 산 물건의 쓸모를 논하며 후배의 씀씀이를 성찰하는 것이었는데, 한 에피소드에서 다룬 물건이 향수였다. 때 마침 당시 SNS에서는 이성을 유혹할 수 있다는 향수 광고들이 범람 중이었다.

콘텐츠를 준비하면서 난생 처음 그 향수 광고와 함께 향과 향수의 쓰임새와 역할을 곰곰이 생각했다. 광고처럼 정말 이성을 유혹하는 향이 따로 있을까? 사람이 맘에 드는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겐 없는 그 사람만의 매력이 있다는 말인데, 향수와 향이 그 다른 매력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향수는 너무 많이 팔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청춘들의 연애에 이 향수가 도움이 되려면 최소한 지역별 할당제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을 하다가 영화와 소설 <향수>의 의미를 알게 됐다.

'사람다움'의 요소


돌이켜보면 추억 속의 사람은 향기마저 기억된다. 그렇기에 다른 칼럼에도 썼듯이 누군가가 날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때론 살아갈 힘이 되니, 누군가에게 선명하게 기억되고 싶다면 자신만의 고유의 향이 있는 것이 좋다. 모두가 같은 향을 갖고 있다면 구별되어 기억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향기, 한 사람의 몸내는 그 사람의 “다움”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학 학습지 선생님이 향수를 안 바꾸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몸내가 없는 그르누이는 사람다움이 없는 사람이다. 때문에 누군가의 곁을 스쳐지나가도 존재는 체감되지 않는다. 부모한테 버려지고 뿌리조차 알지 못해서 무명의 존재인 것이 아니다. “사람다움”이 부재하기에 그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고 사람들 또한 그의 존재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다움은 그 고유의 향으로 존재의 기운을 만들고,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면, 오리지널이 갖고 있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존재의 힘이다. 그 사람다움의 향은 삶의 여정 속에서 내면과 외면에 누적된 무엇으로 발생한다. 그르누이는 이 당연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떤 사람의 향이 좋으면 그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의 향을 흉내 내어 만들려 했다. 그르누이는 반대로 접근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그런 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런 향을 가지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말한 이성을 유혹한다는 향수와 잘 팔리는 향수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영화 스틸컷.
영화 스틸컷.

향수 소비자의 심리


향수를 사는 소비자의 심리는 그르누이의 순서 바뀐 발상과 닮았다. 소비자는 섹시한 어른으로 느껴지고 싶어서, 청순한 아가씨로 느껴지고 싶어서, 터프한 마초로 느껴지고 싶어서 향수를 선택한다. 그 선택의 촉매제는 각종 프로모션과 광고다. 향엔 형상이 없기에 아무리 첨단 CG를 사용해도 향을 보여줄 순 없다. 그래서 캐릭터를 부여하기에 더 좋다. 아무것도 없기에, 손에 잡히는 것이 없기에 그 향기에 형용사 하나를 갖다 붙인 뒤 그 형용사에 걸 맞는 분위기와 이미지, 스타를 기용해 광고를 하면 된다. 패키지도 한 몫 거든다. 모든 향수는 그 나름의 모양을 갖고 있다. 이미지도, 캐릭터도, 이름도 없었던 향이 옷까지 차려 입는 것이다. 투명인간이 옷을 입는 것처럼.

이렇게 향수는 향에서 사물로, 사물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캐릭터로 발전한다. 소비자의 선택은 이 지점에서 이뤄진다. 결국, 향수는 변신의 욕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어떤 향수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사용한다면 도드라진 변신은 실패한다. 오히려 개인의 고유성만 사라지고 대중 속의 나만 남게 된다.

향과 사람다움의 유사성


애초에 그르누이가 향수로 획득하려 했던 것은 “그 다움”이었다. 향수가 없는 자신이 온전한 주체로 대접받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르누이가 알아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향의 성격은 사람다움과 같다는 것이다. 결말이 가까운 이 지점에서 내면의 향을 키우기 위해 마음을 곱께 쓰고 교양을 쌓으라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향과 향수, 그리고 사람다움은 같은 성질을 갖고 있음을 말하려 할 뿐이다.

향은 내 것이지만 나를 벗어나 존재한다. 몸내든 향수로 만든 향기든 타자에 다다라야 그 일을 한다. 향은 또, 내 것이지만 그 다다름의 거리를 알 수 없다. 향수를 많이 뿌리면 멀리 가겠지만 얼마나 멀리 가는지 알 수 없고 진한 향이 두려워 적게 뿌린다고 먼데까지 다다르지 못하는 건 아니다. 향은 또, 내 것이지만 그 좋음과 나쁨의 판단이 내게 있지 않다. 물론 나야 좋아서 쓰는 향수라 하더라도 타인의 후각엔 어떨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백 명의 무명인이 좋아하는 향이라도 단 한 명의 특별한 사람에게 혐오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향이 나는 물건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 골라야 하는 이유다.

결국, 모두에게 사랑 받는 향수는 존재할 수 없듯 사람 또한 그러하다. 자신의 사람다움을 모두에게 환영 받길 바랄 필요 없다. 사형대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에게 사랑 받는 존재는 신의 영역에 다다른 사람이다. 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면 완벽한 나다움을 찾아서, 내게 결여된 무엇을 채워줄 향수를 찾아 헤맬 필요 없다. 애초에 향수는 악취를 묻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세상에 발휘하고 있는 향이 악취만 아니면 된다. 내 사람다움에서 악취만 나지 않는다면 굳이 향수를 쓸 필요는 없다. 나답게 살면 된다. 살다보면 나만의 시그니쳐 향수는 완성 된다. 파트릭 쥐스킨트의 <향수>에 담긴 이 비밀을 처음 읽었을 때 알았으면 좀 다르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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