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이 누구야?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인과 점심을 먹다가 고종석 작가가 화제에 올랐다. 내 또래 글 쓰는 사람치고 고종석의 글 한 줄 안 읽어 본 사람이 있을까? 그 해 여름엔 내 글의 수준을 좀 올려볼 요량으로 <고종석의 문장>을 읽는 중이었다. 고종석은 그 책의 2권에서 전혜린과 피천득을 비판한다. 전혜린은 구별 짓기의 나쁜 예로, 피천득은 그 내면의 황폐함과 생각의 천박함을 비판했다. 비판의 옳고 그름은 둘째 치고 고종석의 배짱이 난 좋았다. 아무리 글쓰기로 당대의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대의 제법 유명한 글쟁이를 이렇게 대놓고 비판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고정석
고정석

이 비판이 생각할수록 놀라운 것이, 이 책의 토대가 대학 강의록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옮겼다 해도 무방하다. 나 같은 소심한 이라면 강의록이 출판사에 넘어가자마자 전화를 걸어 “아, 그 강의록에서 전혜린하고 피천득 선생 비판한 거, 그건 빼고 갑시다.”하고 부탁했을 것이다. 설령 녹취록이 넘어간 뒤 바로 말하지 않더라도 그럴 기회라면 책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몇 번은 더 있었을 것이다. 여러 번의 교정을 거치고 최종 편집본도 검토하니 말이다. 고종석은 그냥 놔뒀다. 그게 멋있었다. 설령 강단에서 옳은 말을 했더라도 그 말이 활자가 되어 세상에 나오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고종석은 말과 글이 일치되게 놔뒀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게 멋있었다. 지인과의 점심 식사자리에서 이 얘기를 무심히 꺼냈던 것이다. 그랬더니 지인이 하는 말이 “고종석? 그 사람이 피천득이나 전혜린보다 유명한가? 난 고종석은 몰라도 두 사람은 아는데."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대화가 끝났다.

琴兒 피천득 문학 전집
琴兒 피천득 문학 전집

 

'속물'의 조건


독자의 주변에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이가 있을 것이다. 비판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비판한 이의 사회적 지위나 학력 등을 기준으로 그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 말이다. 이들에게, 예를 들어 소설가 김영하씨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판했다고 얘기를 하면 먼저 김영하와 무라카미 하루키 중 누가 더 유명한지를 따져본다. 비판의 논리를 따지기 전에 누가 더 유명하고 권위가 있는지 "자기 기준"으로 가늠 해 보는 것이다. 만약 김영하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더 유명하고 권위가 있으며, 심지어 학력도 높다고 판단되면 대번에 "지가 뭔데 비판을 해?"하는 생각을 한다. 그 비판의 논리와 타당성을 따져보기 전에 그 의견 자체를 폄하하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일단 속물이라고 불러보자. 그리고 이 명칭이 합당한지 따져보자. 속물의 사전적 정의는 교양이 없거나 식견이 좁고 세속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다. 우린 이 설명에서 단어 하나를 더 주목해서 풀어봐야 한다. 바로 식견이다. 식견은 학식과 견문이 있어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다. 이 정의에서 단어 하나를 더 풀면 속물의 그림이 명확해진다. 바로 견문이다. 견문은 보거나 듣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이다. 그럼 정리를 해보자. 속물이란 학식과 견문이 좁거나 없어 사물을 분별 못하는 사람이다. 보고 들은 것이 없어 깨달음이 없고 세상의 이치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들은 생의 과거 어느 순간에 얻은 잣대나 틀로 도래하는 모든 경험을 인식하고 해석한다. 이들 앞에선 그 어떤 새로운 것도 낡은 것이 되고, 변화의 새 포도주는 낡은 부대에 담긴다.

결국 속물이라는 불리는 사람은 옷차림, 자동차의 크기, 아파트 평수, 학력, 직위와 직함, 명성 등으로 사람을 먼저 평가하고 그의 생각과 의견을 이어 판단한다. 이들은 선취(先取)된 선험(先驗)적인 틀을 벗어나 생각하는 법을 모른다. 이런 사람한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는 말은 소용없다. 물론 사람이 살면서 얻은 경험과 생각의 틀은 중요하다. 우치다 타츠루도 <수업론>이라는 책에서 인식의 틀을 액자로 표현하며 “액자를 간과한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간과할 가능성”이 있고 “우리 인간은 액자가 없으면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바로 뒤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 “한 가지 액자를 고집하면 세계를 적절하게 인식할 수” 없고, “우리가 적절히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그때마다 세계 인식에 가장 적절한 액자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액자와 정신의 '삶'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선험적인 액자가 없으면 우린 매 순간마다 새로이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부연하면, 경험에 기반 한 귀납적 판단이 없으면 우리의 하루하루는 초단위로 선택의 순간이 이어지고, 그 순간의 불안으로 가득 차 결국엔 미쳐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린,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미치지 않기 위해 액자를 선택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틀이 하나고, 그것이 과거의 것이고, 그 틀이 유일한 생각의 틀이라면 문제가 있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선택한 한 가지 ‘액자’에 스스로 구속”당하게 된다. 다른 해석이 필요한 새로운 상황, 장소, 시대를 만나도 거기에 적응 못한 채 그 구속은 우리를 과거에 묶어 놓는다.

과거의 액자를 벗어나 미래로 향할 수 있는 열린 해석의 길은 있다. 바로 비판적 성찰이다. 강남순 교수는 <질문빈곤사회>에서 비판적 성찰은 “현실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고, 무엇이 변화되어야 할 문제들인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과 비판적 문제 제기는 “모든 변화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이 비판적 성찰을 막는 건 반지성주의다. 반지성주의는 “인간이 지닌 지성 능력, 교육의 의미, 철학적 사유를 비하”하고 “예술, 문학 등과 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를 하찮게” 여긴다. 더 나아가 “과학이나 합리적 사유 또는 비판적 사유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러한 반지성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이다. 이 지점이 바로 속물과 반지성주의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 속물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바로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말한 “정신의 삶”이다. 인간이 지닌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 하여 성찰하고 추론하는 삶이다.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비판적 성찰의 자리


다시 점심 자리의 지인 이야기로 돌아오자. 지인은 고학력자다. 고연봉의 안정 된 직장과 직업을 갖고 있고 관련 학회에선 중책을 맞고 있다. 게다가, 특히, 독서 모임을 두 개나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속물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의 커리어와 학업과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이 그를 “정신적 삶”으로 이끄는데 실패한 것일까? 학력이 인플레이션을 겪었듯이 독서 모임도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걸까? 그렇다. 인플레이션이라면 인플레이션이다. 이미 독서모임은 대형화, 상업화 됐다. 문턱은 낮아졌고 시장도 커졌다. 리더 격의 사람들은 직접 집필과 출판까지 하면서 출판 시장에 영향을 끼친다. 필자 역시, 일 년에 책을 몇 권씩 쓰는 독서 모임 리더도, 책 쓰는 법을 강의해서 지난 몇 년간 수백 명을 작가로 만들어줬다는 리더도 만나봤다.

정신적 삶을 살기 위해선 비판적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앞선 칼럼에서 말했듯이 이런 유형의 독서 모임엔 비판적 성찰이 낄 자리는 없다. 독서 모임이 날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면 비판적 성찰이 거기에 끼지 못한 것이다. 비판적 성찰이 그 자리에 없다면 그 자리는 시간 낭비다. 인식의 액자, 경험의 틀을 흔들지 않는 독서 모임은 사교 모임이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비슷한 생각을 나누는, 일종의 티 파티다.

올 여름에도 각종 매체에선 북캉스라는 신조어 아래 휴가철 추천도서 목록을 남발할 것이다. 올 여름엔 그 목록 밖에서 책을 찾아보자. 그 목록 중에서 가장 낯선 책을 읽어보자. 휴가가 끝난 뒤 그야말로 괄목상대(刮目相對)가 되어 사람들 앞에 서고 싶다면 기존의 틀을 흔드는 책과 만나보자. 낯선 책에 담긴 다른 생각 앞에서 낡은 “액자”를 잠시 내려놓자. 그 낯선 생각이 새로운 생각,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당신을 만들지 모르니까.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