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 @이코노미톡뉴스] 시라노(1990)를 소재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썼다. 온전한 주체를 지켜내기 위해 사랑을 실행하지 않은 채 사랑하는 사람을 추앙만 하는 시라노의 내면에 대해 썼다. 흠모하지만 고백하지 않는 사람의 그 웅크린 내면에 있는 자기애와 그것을 지키기에 급급한 그 비겁함에 대해, 그래서 자신의 던짐 없는 안전한 사랑, 실행 없는 짝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이에 대해 썼다.

(사진=이톡뉴스)
(사진=이톡뉴스)

사랑의 품사를 묻는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랑에 관한 다른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사랑을 “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랑은 동사로 수행되는 것이 분명 한대, 그렇다면 명사일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를 묻고자 한다. 물론 사랑의 품사는 명사이나 이 글에선 움직임 없는, 실행 없는 뭔가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 따져보려 하는 것이다.

이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화양연화>는 사랑 이야기일까? 두 주인공은 사랑을 “한” 것일까? 필자가 이 영화를 처음 봤던 서른 즈음에는 애잔한 사랑 영화로 봤을지도 모르겠다. 이웃에 사는 남녀의 배우자들이 외도를 하고 있고, 공교롭게도 그 외도 상대가 서로의 배우자라는 사실 때문에 이 이웃 남녀의 연애를 응원했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이유로, 보는 내내 안타까움이 밀려왔고 진척 없는 사랑에 아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 시절 내가 봤던 이 영화 속 사랑엔 동사(動詞)의 역동성은 부재했을지 몰라도 그 안타까움만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연인에게 사랑은 동사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지난 사랑은 동사가 될 수 없다. 추억이라는 명사의 범주로 분류된다. 이렇게 범주를 구분하고 나니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왕가위 감독은 이 흑백사진 같은 사랑 이야기의 배경으로 왜 60년대를 선택했을까? 지금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사랑이 아니라 과거의 사랑 이야기임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이토록 먼 과거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

어쩌면 왕가위 감독은 20세기엔 에너지 넘치는 동사였던 것들이 21세기 홍콩에선 더 이상 그 구실을 이어 나갈 수 없음을 예감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유부녀/유부남이 관심과 참견, 친절과 속박 사이의 그 뭔가로 엮인 이웃들의 시선을 피해 사랑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대를 배경 삼아, 굳이 이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를 머뭇거리며 늘어놓았던 것은, 어쩌면 느와르의 전성기를 열었던 20세기 말의 홍콩에서 가능했던 것들을 불가능한 것으로 전락시킬 뭔가가 도래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모든 것이 가능했던 시대의 그리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요즘엔 흔하디 흔한 불륜조차 쉽지 않았던 시대를 빌려와 이야기한 건 아닐까? 불가능이 범람할 미래의 홍콩 시민과 모든 것이 가능했던 홍콩을 사랑했던 세계인들에게 모든 것이 가능했던 그 시대의 홍콩, 그 붉게 타올랐던 아시아의 꽃 같던 홍콩을 잊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홍콩의 화양연화를 잊지 말아 달라고.

사랑은 해석을 요구한다.


잠시 감독의 의도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야기의 줄기에서 벗어났다. 다시 영화와 사랑 이야기로 돌아오자. 우리가 답을 얻어야 될 질문을 상기해보자. 동사가 아닌 사랑은 언제 어떻게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까? 오늘 이 순간, 움직임 없는 무엇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은 언제, 어떤 형태로 도래하는 걸까?

남자 주인공 차우가 무협소설을 쓰는 것과 집필의 공간인 호텔에 주목하며 그 답을 찾아보자. 그가 쓰는 무협 소설은 환상의 세계다. 무협 소설의 주인공도, 그 주인공들이 쓰는 모든 무술도 허구고 환상이다. 허구와 환상은 그럴듯한 이름과 설명이 있어야 비로소 그 구실을 한다. 마치 보르헤스 소설 속의 거짓 각주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환상과 허구는 읽는 이에게 해석을 요구한다.

두 남녀는 호텔에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오로지 소설만 쓴다. 그 과정, 그 시간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임을 더 깊이 느끼지만 호텔은 집필 공간의 역할만 한다. 호텔의 붉은 복도도, 말끔히 차려입은 두 남녀의 옷도, 침실도 오직 집필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를 통해, 이 철저한 용도 한정과 그 한정으로 박제된 것들을 통해 <화양연화>의 사랑은 해석이 필요한 환상으로 보존된다.

세계와 사회가 부여한 옷을 벗지 않고, 일상의 이름을 벗어던지지 않은 채, 마치 볼륨 댄스를 추듯이 밀착하되 밀착하지 않으며 격식 있는 유희로 지켜진다. 첸 부인이 치파오를 수십 벌 갈아입어도, 매일 정성 들여 머리를 매만져도 거기엔 동사의 가능성은 없다. 볼륨 댄스의 격식을 위한 장치, 명사인 사랑을 위한 이미지, 해석의 가능성만 확장되고 부풀릴 뿐이다.

오늘, 움직임 없는 사랑은 해석을 기다린다. 해석은 오늘의 이성으로 어제의 일을 떠올려 앞으로 음미할 의미를 생성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 모른 채 수행되었으나 우연히 오늘 그 일을 떠올려 생각해보니 어떤 의미인지 알아, 살아가는 날들 동안 그 사건과 깨달은 의미를 두고두고 음미하는 것이 해석의 역할이다. 이 해석을 위해 우린 과거의 이미지와 말, 텍스트들을 반추할 수밖에 없다. 많은 영화 팬들이 이 영화에 범람하는 소품, 의상, 공간, 음악, 그리고 미장센을 분석하는 것도 결국 동사가 아닌 사랑은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스틸컷.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스틸컷.

그것은 사랑이었다.


결국, 해석이 요구되는 사랑은 오늘 벌어지는 사건을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결국, 질문을 바꿔 던질 수밖에 없다. 오늘, 사랑의 수행성 없는, 명사이자 사진처럼 해석을 요구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가? 사랑이라면 그것은 언제 사랑의 의미를 획득하는 걸까? 영화는 말한다. 돌아보고 해석하고 음미한 뒤 마음이 아프면 사랑이다. 오늘은 미처 몰랐지만 내일 생각해보니 마음이 아프고 그 사람이 그립다면, 그건 분명 사랑이다. 그렇다. 그 시간이, 그 공간이, 그 사람이 그리우면 사랑이다. 차마 잊지 못해 마음에 묻어두면 사랑이다. 언젠가 한 번은 그 사람을 또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돌아보니 내 인생에서 그때가 가장 화려했고, 그때가 화려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오직 그 사람 때문이라면 그것은 사랑이다. 돌아보니 그 도시에서 보낸 시간이 내 인생의 전성기였고, 그 도시가 그렇게 기억되는 이유가 그 도시의 하늘을 누군가와 함께 올려다봤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사랑이다. <화양연화>는 그렇게 말한다.

왕가위 감독은 베드신을 촬영했지만 삭제했다. 사랑의 서사는 그것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는지 모른다. 돌아본 사랑이 눈부신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기억 때문임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도, 실패하고 좌절된 사랑도 충분히 우리의 삶의 찬란한 순간으로 간직될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의 홍콩이 지금과는 다른 찬란한 홍콩이듯이, 사랑 또한 마음속에서 오늘 다시 피어나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찬란한 순간이 오늘 다시 연한 빛을 내며 추억으로 불쑥 피어오를 때, 이 비루하고 남루한 삶에도 화양연화 같은 나날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에 기대어 스스로 위로하며 묵묵히 살다 보면 또 언젠가 그런 순간을 맞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얘기가 또 곁길로 빠졌다. 다시 돌아가자. 고백하지 못한 사랑은, 동사가 되지 못한 사랑은 사랑이 아닐까? 이 세계가 정한 법과 규칙의 장(場)에서 살아남기 위해 차마 동사로 만들 수 없었고 불가항력적으로 어쩔 수 없이 사랑의 징후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지만, 앞서 쓴 문단과 같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사랑이었다. 길구봉구의 노래 가사를 빌려와 말하면, 버릇처럼 너를 다시 부를 만큼 그 사람이 매일 그립고, 늘 같은 자리 그 사람이 있던 곳에서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 그건 사랑이었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아프고, 그때 왜 그렇게 미련했고 어리석었는지 자책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너를 습관처럼 떠올릴 수밖에 없다면.... 그렇다. 그건 사랑이었다. 루나가 부른 노래의 가사처럼, 사랑이었다. 그 시절, 그 도시에 “나보다 소중한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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