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수도 없는 CD는 왜 사달라는 걸까?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최근, 딸이 자꾸 아이브의 CD를 사달라고 한다. 들은 척도 안했더니 요즘엔 아예 외갓집에서 받은 거금의 용돈을 들이대며 제 돈으로 사겠다고 한다. 이 바람을 이해 못했었다. 집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가 없기 때문이다. 카세트 데크는 물론이고 턴테이블도 없고 CD플레이어도 없다. 이 현실을 앨범을 살 필요가 없는 이유로 댔더니 음악은 다른 데서 들어도 된단다. 자기는 그 안에 다른 것이 필요하단다.

그렇다. 알고 봤더니 딸이 앨범을 사고 싶은 건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앨범과 함께 담긴 다양한 굿즈 때문이었다. 앨범 패키지 안에 포토 카드, 포토 앨범, 써클(원형의 스티커 같은 것) 등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돌 덕질을 안 해본 사람이라면, 설령 했더라도 그것이 세기말에서 세기 초의 일이라면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것이다. 요즘 애들은,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걸 위해서 앨범을 산다. 그야말로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격 아닌가?

나도 한때는 열심히 음반을 사 모았다. 일주일 용돈이 3만원이었던 대학 시절, 아끼고 아껴 음반을 샀다. 그때는 재즈와 얼터너티브 록에 빠져 있었다. 덕분에 지금도 제법 앨범을 갖고 있다. CD는 700장 가량, 카세트테이프는 100개 정도, LP는 50장 가량 된다. 대학 졸업 이후 앨범을 전혀 사지 않다가 최근 들어 아주 드물게 앨범을 산다. 물론 그 이후로 음악을 듣지 않은 건 아니다. 소리바다와 벅스 뮤직에서 음악을 들었고 유튜브에서도 음악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앨범은 버리지 않았다. 좀 형편이 나아지면 CDP와 턴테이블, 카세트데크까지 있는 그럴싸한 오디오 플레이어 세트를 구입하리라 다짐하며 21세기를 버텼다. 그 사이 컴퓨터에선 CD롬까지 없어졌기에 내가 갖고 있는 앨범들은 그야말로 유물이 되어 버렸다.

앨범과 뮤지션에 기대했던 것들


그 시절, 우리가 앨범을 사며 기대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음악이었다. 앨범 속지엔 기껏해야 가사와 참여한 아티스트의 이름이 실렸었다. 좀 세련된 회사라면 아티스트의 사진 몇 장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정도였다. 그나마 CD나 LP가 그랬지, 그걸 우겨넣을 공간이 부족했던 카세트테이프엔 가사집도 간신히 넣어졌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 음악을 듣던 사람에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건 음악이었다. 톤 암을 조심히 들어 굵은 흠에 맞춰 내려놓고 음악이 나올 때까지 돌아가는 LP의 빛나는 광채를 응시하는, 그 순간의 설렘이 더 중요했다. 기다리던 음악이 나올 때까지 카세트 테이프의 소리 없는 구간이 끝나길 기다리는 시간이 더 소중했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이지도 않던 CDP 안으로 CD가 사라진 뒤 음악이 나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시간이 더 소중했던 시절이다.

기다림 끝에 나오던 음악처럼 모든 앨범 또한 팬의 애간장을 태우는 긴 기다림 뒤에 나왔다. 요즘처럼 툭하면 싱글을 던지고 미니 앨범을 던지던 시절이 아니었다. 아티스트는 앨범의 활동이 끝나면 칩거했고 맘이 맞는 아티스트와 음악을 만들었다. 그동안의 근황은 아무도 몰랐다. 어느 산에 가있는지, 어느 골방에 처박혀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 불쑥 새 앨범 발매 소식이 전해졌고 팬들은 그 앨범이 나오자마자 대형 음반 매장을 찾아 앨범을 샀다. 오직 음악을 듣기 위해서. 작곡가와 작사가의 이름을 확인하고 참여한 뮤지션의 면면을 살폈다. 방송에선 주로 타이틀곡이 나왔지만 앨범을 산 진정한 팬이라면 마지막 트랙까지 책을 정독하듯이 들었다. 때론 가요 톱10같은 음악 방송에서 순위를 다투는 곡보다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곡을 더 사랑하기도 했다. 소위 골수팬이라면 네 번째나 다섯 번째 트랙을 타이틀곡으로 했어야한다고 성토하기도 했다. 그런 트랙은 평생 간직되는 보석 같은 히든 트랙이 된다. 노래방에도 없는 그 곡은 언제나 마음속으로 흥얼거릴 수 있었다.

'가왕'(歌王) 조용필이 2018년 10월 23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공개행사에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총 5,050개 한정 수량으로 제작되는 메달 3종의 앞면은 조용필이 공연하는 모습, 뒷면은 위조 방지를 위한 잠상과 50주년 기념 엠블렘을 새겼다. (사진=연합뉴스)
'가왕'(歌王) 조용필이 2018년 10월 23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데뷔 50주년 기념메달' 공개행사에서 무대에 오르고 있다. 총 5,050개 한정 수량으로 제작되는 메달 3종의 앞면은 조용필이 공연하는 모습, 뒷면은 위조 방지를 위한 잠상과 50주년 기념 엠블렘을 새겼다. (사진=연합뉴스)

가장 최근에 산 앨범


내가 가장 최근, 마지막으로 산 CD는 조용필 선생님의 19집 <Hello>였다. 물론 그때도 CD 플레이어가 없었다. 가왕의 음악은 다른 방법으로 들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을 샀던 건 한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그 안에 포토 카드도, 포토 앨범도 없이 그저 과거의 앨범 표지와 속지 밖에 없었다. 오직 그의 음악 때문이었다. 방송에서 가왕의 신곡을 잠시 듣고 충격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이런 음악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걷고 싶다.>를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 그 노래에서 선생님은 그리운 사람을 절절히 부르신다. “난 널 안고 울었지만, 넌 나를 품은 채로 웃었네. 오늘 같은 밤엔 전부 놓고 모두 내려놓고서 너와 걷고 싶다 너와 걷고 싶어. 소리 내 부르는 봄이 되는 네 이름을 크게 부르며 보드라운 니 손을 품에 넣고서.”하고 부르며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하고 싶은 소소한 일상의 순간을 부르신다. 이 노래가 누구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인지, 그 사연을 알고 들으면 저 가사가 더 깊이 와 박힌다. 때문에, 나 또한 무한 반복해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 후렴구에 수도 없이 울컥했다.

그렇게 나를 울렸던 가왕이 근 10여년 만에 돌아온다. 정규 20집 발매에 앞서 두 곡이 담긴 싱글 앨범을 먼저 11월에 선보였다. 한 곡의 제목은 <찰나>, 다른 곡은 <세렝게티처럼>이다. <찰나>를 들어본 평론가들은 젊은 록커의 음악, 패기가 느껴지는 음악이라고들 한다. 들어보니 그 평가가 맞다. 음악은 통통거렸고, 가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요즘 입말로 꾸미 없이 표현했다. <세렝게티처럼>은 또 어떤가. 노장이 우리에게 보내는 응원가다. 뉴스를 보기 짜증날 정도로 우울한 뉴스만 가득한 요즘, 가왕의 노래는 무한한 가능성과 꿈, 그리고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우리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생명력에 대해 얘기한다.

가수 최백호가 2017년 3월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뮤지스땅스에서 열린 40주년 기념 앨범 '불혹'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가수 최백호가 2017년 3월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뮤지스땅스에서 열린 40주년 기념 앨범 '불혹' 발매 기자간담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돌아온 두 거장


지난 가을, 가왕과 동갑내기인 한 가객도 같은 제목의 노래, <찰나>로 돌아왔다. 최백호 선생님이다. 이 노래, 몇 년 전에 나온 <바다 끝>의 다음 이야기 같다. <바다 끝>에서 선생님은 “짙은 어둠만 남은, 시작도 그 끝도 알 수 없는 그 곳에 물결처럼 춤추던 너와 나를 놓아주자.”고 하셨다. 그리고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몰라.”라고 고백하셨다. 그렇게 그 깊은 바다에 빛나는 순간과 그 순간을 만들어준 사람에 대한 미련까지 가라앉혀 놓고 오신 것 같았다. <찰나>에선 그 놓고 온 순간과 사람에 재차 회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빛나던 순간, 희미한 순간 그 모든 찰나들이 나의 삶을 가득히 수놓았음을, 지금 이 순간도 나의 빛나던 찰나여, 이미 지나버린 찰나여, 나의 영원한 찰나여, 지금 빛나는 순간이여”라고 노래하신다.

앞서 말했듯, 최백호 선생님의 앨범은 이미 나왔다. 신인 음악가와 젊은 후배 가수들과 협업한 앨범이어서 더 의미가 깊다. 조용필 선생님의 앨범은 조만간 나온다고 한다. 이미 나온 가객의 앨범도, 앞으로 나올 가왕의 앨범도 모처럼 사려고 한다. 여전히 CD 플레이어는 없지만 조만간 아내가 산다고 하니 그 말을 믿고 사두려고 한다. 덕질을 할 만한 굿즈는 전혀 없겠지만 그래도 사려고 한다. 수출하기 좋게 만든 K-POP이 아니라, 쉰이 넘은 평범한 중년 남자의 마음을 흔드는 “가요”다. 문화재라 불러도 무방한 세월 속에 곰삭은 노래다. 칠순이 넘은 두 거장의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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