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소망을 담은 제품

(사진=이톡뉴스DB)
(사진=이톡뉴스DB)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홈쇼핑을 가끔 본다. 제품 구성을 살펴보고 전력을 다해 제품을 판매하는 호스트의 말을 곱씹다보면 특정 시기의 소비자 욕구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1월 1일, 홈쇼핑에선 뭘 팔았을까? 오전엔 건강식품과 화장품을, 오후엔 러닝머신을 팔고 있었다. 한참을 서재에 박혀 있다 저녁나절에 다시 봤더니 여행 상품을 팔고 있었다. 채널을 돌려 봤다. 소위 4대 홈쇼핑 채널뿐만 아니라 다른 군소 채널도 대부분 여행 상품을 팔고 있었다. 북유럽, 동유럽, 서유럽, 미국 서부, 베트남, 일본, 제주도 등 목적지는 제 각각이었다.

종일 뭘 팔았는지 세부적인 편성이 궁금해서 업계 최고라고 인정받는 한 채널의 편성표를 확인해 봤다. 아침 여덟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의 대략적인 편성표는 다음과 같다. 화장품-건강식품-화장품-전자제품-러닝머신-여행상품-다시 화장품-건강식품-다시 여행상품-건강의료가전으로 이어졌다. 소비자의 새해 소망을 담은 제품 구성이다. 더 예뻐지고, 더 건강해지고, 못했던 해외여행을 통해 새로운 경험도 해서 새로운 기분, 새로운 나로 새해 새 출발을 하고 싶다는 그런 소망 말이다.

새해 다짐과 작심삼일


이날 저녁 아내에게 농담처럼 말했다. 마침 월요일인 1월 2일,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은 헬스장과 수영장일 것이라고. 과연 그랬을까? 내가 다니는 수영장은 헬스장과 붙어 있다. 헬스장 러닝머신 라인에선 수영장을 내려다 볼 수 있고, 수영장에선 러닝머신을 뛰는 사람들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구조다. 이 날은 라커룸부터 제법 북적였다. 샤워장에도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못 보던 사람도 제법 됐다. 수영장의 기초반 레인과 중급반 레인엔 유독 사람이 많았다. 어림잡아 각 레인에 열다섯 명은 넘어 보였다. 수영장에서 올려다보니 러닝머신 라인엔 빈자리가 없다. 운동을 하여 건강을 증진시키고 살을 빼고 몸매도 바꿔 새해에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그 바쁜 연말에 짬을 내어 헬스장과 수영장에 등록한 사람들이다.

이런 다짐은 주기적이다. 생애 주기적으로도 하고, 한 해의 주기 속에서도 빈번히 한다. 이런 주기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많다. 앞서 말한 수영장만 해도 그렇다. 정초에 좀 늘었다가 설 이후 줄어든 후 봄쯤 다시 늘었다가 또 준다. 그러다 여름에 수강생이 다시 부쩍 늘었다가 겨울이 되면 확 줄어든 후, 정초가 되면 다시 늘어난다. 이 주기가 반복된다. 헬스클럽도 마찬가지다. 정초에 부쩍 늘었다가 급격히 줄어든 후, 여름철 노출이 신경 쓰이는 사람들로 인해 5월쯤 다시 훅 늘었다가 가을에 줄어든다. 학생도 이런 주기를 반복한다. 시험 때가 다가오면 정신 차리고 공부하자는 다짐을 하기도 하고 학년이 올라갈 때도 같은 다짐을 한다. 또는 상급학교로의 진학과 함께 마음을 다잡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익히 우리가 경험했듯이 이런 다잡은 마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한 해는커녕, 한 달도 쉽지 않다.

변화를 만드는 힘


새해가 됐다고 갑자기 변화가 생기진 않는다. 밀레니엄이 왔다고 밀레니엄 버그는 물론이고 뒷골목에서 느닷없이 터미네이터가 등장하지 않았듯이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나도 세상도 갑작스레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장품을 바꾸고 낯선 도시로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 새로운 내가 되진 않는다. 또, 앞서 예를 들었듯이 굳은 다짐만으론 변화가 일어나진 않는다. 변화는 일종의 새로 태어남이다. 과거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변화엔 다른 차원의 마음이 필요하다. 이건희 회장님의 유명한 말씀을 빌려와 말하면 그야말로 마누라 빼놓고 다 바꾸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

이런 변화를 향한 염원을 현실로 만드는 단호한 마음가짐을 결단이라 한다. 결단(決斷)의 단(斷)은 끊어짐을 의미한다. 단절, 단층 등에 쓰이는 한자다. 이 한자는 도끼 근(斤)과 이을 계(繼)가 합쳐진 단어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도끼로 단숨에 잘라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결단은 그만큼 단호한 마음가짐이다. 결단은 과거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보존이나 현상 유지의 욕구보다 더 높은 차원의 강렬한 욕망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극복의 의지다.

결단이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 건 이러한 자기 극복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단 뒤에는 결별의 고통이 뒤따른다. 과거의 나를 지우는, 좀 격하게 표현하면 어제의 나를 죽이는 고통이 뒤따른다. 이 결별은 단숨에 이뤄지지 않는다. 결단 후의 고통스러운 실천이 몸에 배어 삶의 습관이 될 때쯤 결별이 완성되고 변화가 뒤따른다. 우리가 변화 된 나를 만나기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 서초구 잠원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2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 아시아선수권대회 여자 볼더링 결승에서 사솔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잠원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2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 아시아선수권대회 여자 볼더링 결승에서 사솔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포기를 부르는 정체기


또 다른 이유는 정체기다. 정체기는 이 고통스러운 실천을 반복하여 습관이 되기 전에, 그래서 과거의 나와의 결별이 완성되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결별의 고통은 계속되는데 변화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 시기에 만나는 정신적, 육체적 고비다. 단적인 예로 모든 운동엔 정체기가 있다. 필자가 경험했고 사랑했던 운동들도 이 정체기를 극복해야 차원이 다른 다음 레벨로 진입할 수 있었다. 마라톤도 그랬고 스포츠 클라이밍과 수영도 그랬다.

정체기를 맞으면 포기하고 싶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포기를 한다. 이런 정체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습관의 시기가 올 때까지 결단과 실천을 반복하는 것이다. 매번 자유형과 배영을 배운 후 접영과 평이라는 장애물에 막혀 절망한 뒤 수영장을 안 나가고, 새로 산 참고서의 앞 단원만 풀고 큰 맘 먹고 산 책의 한 장만 읽는 것이 반복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계속 수영장에 등록하고 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차이를 만드는 도전의 반복


고병권 선생님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인용하며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도전이라는 반복을 멈추고 포기하는 것은 반복 된 시도 자체가 지겹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단순한 놀이를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기들은 사라졌다 나타나는 “까꿍 놀이”를 수십 번 반복해도 할 때마다 까르르 대며 웃는다. 어린이들은 주사위 던지기도, 결과가 뻔한 카드 게임도, 규칙이 변하지 않는 보드 게임도 매번 즐겁게 한다. 반복 된 놀이 속에서도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를 만끽하며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발견하는 에너지를 동심이라 부를 수도 있다. 주어진 오늘을 힘을 다해 누리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결과를 미리 예상하지 않고 지금 하고 싶고 즐거운 일에 전력을 다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차이의 발견에도 가슴이 뛰는 호기심을 유지하는 삶이라 부를 수도 있다. 매번의 시도 속에서 느껴지는 이 작은 차이에 용기를 얻어 더 나은 나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하는 것만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살면 살수록 우린 1인분의 책임 위에 수많은 이들의 삶을 포개어 얹는다. 그것을 관계라 부른다. 그 관계는 우리가 지금 무언가를 결단하는 동기로 작용하여 평소에 하기 싫던 것을 하게 한다. 이러한 결단의 여파는 나를 벗어나 넓게 퍼진다. 가족을 위한 결단이 자신을 변화시키고 가족의 삶에 영향을 주며 가족 구성원이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준다. 새해를 맞은 당신은 어떤 결단을 했는가? 작년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재차 결단하여 실천을 밀어 붙여 당신의 삶을 바꾼다면, 조만간 기대했던 당신을 만날지 모른다. 오늘도 러닝머신에서 뛰었던 당신, 오늘도 수영장에서 물을 잔뜩 먹었던 당신, 담배와 술을 끊기 위해 애쓴 당신을 응원한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키워드

#삶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