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 2006) 스틸컷.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 2006) 스틸컷.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지난 해 마지막 촬영 현장은 울산문화예술회관 대극장이었다. 표현하고자 하는 영상이 까다로워 서울에서 최고 사양의 카메라를 대여하고 함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조명 감독도 서울에서 장비와 팀을 꾸려 내려 왔다. 촬영 당일, 오전 열 시쯤 현장에 도착하니 촬영 준비가 얼추 끝나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조명 감독과 인사를 하고 싶어 두리번거리다보니 아담한 청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침 담배를 태우고 온 조명 감독과 인사를 한 후, 누구냐고 물어보니 자기 팀 막내라고 했다.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촬영 중 조명의 위치와 각도를 수정하라는 조명 감독의 지시에 답하는 목소리를 들어보니 영락없는 여자다. 짧은 머리, 푹 눌러쓴 캡, 두툼한 후드 티, 헐렁한 청바지, 운동화, 여기에 뿔테 안경까지. 아무리 봐도 소년 같았다. 그러나 여자였다. 아가씨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꿈'을 찾아온 청년


드라마나 영화 제작 현장, 그리고 우리와 같은 광고나 홍보 영상 제작 현장엔 여성이 드물다. 지방엔 더 그렇다. 여성이 이런 현장에서 일하기 힘든 이유야 여러 가지지일 것이다. 그 중 하나를 꼽자면 일단 신체적으로 힘들다. 예를 들어 조명 팀의 경우엔 장비의 무게가 상당하다. 조명 자체의 무게도 상당하지만 조명을 높이 올리는 봉의 무게도 제법 된다. 조명으로 커버해야 하는 공간이 넓으면 넓을수록 조명의 숫자도 많아지니 그에 따라 봉의 숫자도 많아지고 조명을 전원과 연결시키는 케이블의 길이와 무게도 늘어난다. 인물이 여러 명이거나 인위적으로 조명을 조절해야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반사판의 숫자도 상당하다. 게다가 2단, 3단으로 뽑아 늘이는 봉을 잡아 올리는 건 남자라도 경험이 없으면 쉽지 않다. 이 날 현장의 막내, 그 아담한 톰보이는 힘에 부쳐 팔뚝을 떨면서도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없이 조명감독의 지시에 따라 봉을 올리고 내렸다. 무거운 조명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다음날 아침, 논산의 드라마 촬영 현장에 재투입되어야 하는 "막내"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이동을 위해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조명감독에게 물었다. "그 친구 몇 살이에요? 스물 넷? 다섯?", 조명감독이 답했다. "스물 셋.", "그럼 대학을 막 졸업한 건가?" 내가 이어 물었다. "그렇지." 조명감독이 다시 답했다. 정말 궁금한 걸 물었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이 일에 뛰어든 거예요?", "그렇죠. 자기가 조명을 하고 싶어서 온 거야. 대단하지." 조명감독은 진심으로 대답했다. "그러게. 요즘 그런 친구들 거의 없는데. 이 힘든 일을...", 그렇게 우린 앞뒤 안 재고 이 판에 뛰어든, 그것도 역설적이게도 가장 조명 받지 못하는 조명 일에 뛰어든 그 아가씨 칭찬을 잠시 이어갔다.

전형적인 해피엔딩 성공담


영화 내내 아들에 대한 부정(父情)이 절절하다. 아들을 위해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아버지의 노력이 눈물겹다. 고난을 극복한 전형적인 성공담이다. 주인공은 가족을 위해 딱 봐도 안 팔릴 것 같은 의료 기기를 팔기 위해 수도 없이 전화를 하고 여러 병원의 문턱을 그야말로 뻔질나게 넘는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다. 세일즈맨이 세일즈에 실패하니 살림은 궁핍하다. 아내는 집을 나가고 집세도 못 내 쫓겨난다. 주인공은 아들과 노숙자 숙소를 전전하면서도 남아 있는 의료 기기를 팔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다 우연히 증권사 중개인이라는 직업을 알게 되고 어려운 시험을 보고 실습 과정을 통과한 뒤 취업에 성공하여 성공가도를 달린다. <가드너 앤 리치 컴퍼니>라는 투자사의 사장인 크리스 가드너의 실화다.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다. 아메리칸 드림이다. 부정(父情)의 미담이자 인내와 노력이 결실을 맺는 이야기다.

지금 뭔가를 하는 삶


영화를 다시 보니 그전에 안 보이던 것이 보였다. 이렇게 평범한 흑인이 주인공인 영화가 또 있을까 싶었다. 인생 역전의 한방을 품고 있는 천부적 재능은 없다. 운동도 못하고 음악도 못한다. 심지어 자신이 뭘 잘하고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대해 고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대신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살기 위해 뭐든 했다.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걸 했고, 해야 할 걸 했다. 그 뭔가를 “하는 삶”의 모든 순간이 행복 추구의 순간 아닐까?

영화의 원제는 <The Pursuit of Happiness>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행복을 찾아서>보다는 <행복의 추구>가 맞다. “찾다”는 동사인 반면, “추구”는 명사이기 때문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Find는 동사고, Pursuit은 명사다. 역설적이게도 관객들은 동사로 번역 된 영화 제목 때문에, 그의 “하는 삶”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의 고단한 삶의 순간순간을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으로만 간주한다. 그 여정 끝에 맞이한 해피 엔딩에 환호한다. 주인공이 그렇게 찾고 싶어 하던 행복을 찾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극장을 나온다. 숨겨진 보물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인디애나 존스가 온갖 고난 끝에 보물을 찾은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종류의 카타르시스다.

(사진=EconomyTalk NEWS)
(사진=EconomyTalk NEWS)

자신의 행복을 만드는 하루


딸에게 들어보면 본인은 물론이고 반 친구들의 꿈은 자주 바뀐다. 여러 개의 꿈을 가진 아이도 있다. 부모들은 아이의 적성을 찾아주겠다고 이 학원 저 학원을 보내보고 학교와 교육청, 각종 단체에서 시장의 좌판처럼 벌여 놓은 다종다양한 프로그램에 아이들을 집어넣다 빼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학년이 올라가면 지역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영재 시험에 응시하기도 하고, 얼떨결에 인문, 과학, 창의 발명 등으로 숭덩숭덩 나눠진 분야의 영재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다종다양한 경험과 스펙을 쌓은 아이들이 커서 대학을 가고 어른이 된다.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그런 어른들 중엔 종종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판단을 못하여 방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삶이란 뭔가를 시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 자체일지 모른다. 뭘 하더라도 결국 자신이 행복할 방법을 찾아 밀고 나가는 것, 그 과정이 행복 추구의 현장이자 순간일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을 추적대의 선봉장 삼아 오늘 하루의 행복을 위해 묵묵히 하고 싶은 걸 하고, 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이 행복의 추구 그 자체이고, 어쩌면 인생 그 자체일지 모른다. 그 끝에 진짜 내가 있고, 진짜 행복이 있는지, 그 역시 자신만이 알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행복


스물 셋의 청년을 만났다. 난 그에 대해 모른다. 대충 이 판에 들어 온지 몇 개월 정도 됐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밤 시간, 울산에서 논산으로 바로 가는 교통편을 구하기 어려워 우선 차편이 있는 본가가 있는 전주로 가서 부모의 차를 얻어 타고 논산으로 갈 것이라는 말로 비추어 볼 때, 그의 선택을 그의 부모도 응원해주는 모양이다. 특히, 그 자신,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것 같다. 촬영이 쉬는 시간이면 조명 감독과 함께 조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한 번의 촬영이 끝난 후엔 조명 감독 어깨너머로 모니터링을 하는 그의 모습을 봤다. 행복해 보였다. 오늘 행복을 만들며, 하루하루 행복을 쌓아가는 삶, 그 자체였다.

이 청년에겐 이 일로의 뛰어 듦, 이 일의 과정, 그 모든 것이 행복일 것이다. 사랑하는 일을 하기 위해 이 도시, 저 도시, 이 현장 저 현장을 떠돌면서도,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니면서도, 낡은 승합차에 장비와 함께 실려 다니면서도 그는 행복할 것이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지금 하는 삶, 그 자체,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 그 자체가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스물 셋의 청년에게 배웠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이 칼럼을 써 나갔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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