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다들 우울할 때 보는 영화가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이 내 맘 같지 않고 인생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낮술을 마신 탓에 얼큰히 취한 해질녘, 마지막 한 잔을 하면서 취기와 함께 우울도 밤의 어둠 속에 묻어두고 내일은 새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을 때, 그럴 때 보는 영화 말이다. <쿵푸 허슬>은 내게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가난한 마을에 숨어 사는 은둔 고수들이 마을과 주민을 위협하는 갱단과 투쟁하다 목숨을 잃은 뒤 마을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고수의 운명을 타고났음을 뒤늦게 알아챈 청년이 갱단과 맞서 싸워 마을을 구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써 놓으니까 어째 <소림축구>와 비슷하지 않나? 인물도, 배경도, 내용도 비현실적인 코미디다. 그러나 웃으며 넋 놓고 보다가 감독 주성치가 숨겨 놓은 메시지를 놓쳐선 안 된다.

쿵푸 허슬(功夫, Kung Fu Hustle, 2004) 스틸컷.
쿵푸 허슬(功夫, Kung Fu Hustle, 2004) 스틸컷.

세 종류의 '비범함'


우선, 감독은 세 부류의 비범한 사람에 대해 말한다. 먼저 비범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 갱단 도끼파다. 그들의 비범함은 태생적이지도, 내재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스스로, 홀로 비범할 수 없다. 이들의 비범함은 타자와의 상대성을 통해 드러난다. 착취해야 될 타자, 괴롭혀야 될 타자, 억압과 폭력의 대상이 되는 타자가 없으면 그들의 비범함도 없다. 또, 이들의 비범함은 비범해 보이는 상징을 공유하는 무리에서 나온다. 때문에 그들은 비슷한 모양의 좋은 옷을 입고 비싼 차를 탄다. 이 비범함은 허위적 비범함이다. 이런 허위적 비범함은 성공이라는 말로 포장될 수 있다. 주인공 싱이 고수의 운명을 깨우치기 전 꿈꾸던 비범함은 이런 것이었다.

두 번째 부류는 비범함을 숨기고 사는 사람이다. 비범함을 삶에 녹여 사는 사람으로 봐도 되겠다. 가난한 마을 돼지촌에 숨어든 무림의 고수들은 자신들의 무공을 생업의 기술로 전환, 또는 응용하며 산다. 그러다 사회가 그들의 비범함의 원형을 원할 때 기꺼이 비범함을 발휘한다. 마치 휴가를 얻은 소방관이나 비번인 간호사가, 휴가나 학회 참석을 위해 비행기에 탔던 의사가 위험과 위기에 처한 낯선 이를 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부류는 주인공 싱처럼 자신의 비범함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각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비범함은 내재되어 있다. 앞서 말했듯, 그 내재된 비범함을 자각하지 못할 땐 허위적 비범함을 꿈꾼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대신 비범함의 상징과 이미지를 동경한다. 그동안엔 자신의 비범함을 볼 수 없다. 잠재된 내면의 비범함은 내면의 소리에 따라 행동했을 때 발현된다.

우리 모두에겐 '비범함'이 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이 영화는 비범함의 종류에 대해 말하는 영화인 것만 같다. 그러나 주성치는 여기에 한 가지 메시지를 더 얹는다. 모양새와 능력의 종류가 제 각각일 뿐 모든 사람에게 나름의 비범함이 있다고 말한다. 영화 초반의 한 장면에 그 메시지가 담겨 있다. 주인공 싱이 갈취를 하러 간 가난한 마을 돼지촌에서 주민들과 실랑이하는 장면이다. 싱은 만만한 외모를 가진 사람을 골라 대결을 신청하지만 막상 나온 사람의 외모를 보니 예상과는 달랐다. 순해 보이는 아줌마는 주먹 파워가 장난이 아니었고 키가 작아 보였던 사람은 사실 앉아 있는 키다리였으며 안경잡이 노인과 동안의 소년은 근육질이었다. 외모만 보고 고른 상대의 확인된 실체에 기가 죽었던 싱은 허세를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돼지촌의 주인아줌마가 등장한다. 누가 봐도 평범한 아줌마다. 싱은 이 아줌마에게도 맞는다.

주성치 감독은 이 다음 장면에서 한걸음 더 나간다. 싱이 일당을 부르겠다고 협박하며 던진 폭죽이 담장을 넘어 도끼파의 이인자 머리 위에서 터져 버린다. 이인자는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돼지촌으로 들어와 누가 던진 거냐고 묻는다. 싱은 주민들을 가리키며 한참을 얘기한다. 뭐라고 얘기했는지 모르지만 주민들 탓으로 돌린 건 분명하다. 결국, 이 거짓말을 기점으로 투쟁이 벌어진다. 진정한 비범함과 허위적 비범함이 투쟁한다. 투쟁에 몰입한 관객은 그 발단을 잊곤 한다. 그러나 우린 잊지 말고 곱씹어 봐야 한다. 따지고 보면 싱은 자신이 원인 제공을 한 투쟁을 수습한 것뿐이다. 감독 주성치가 진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바로 이 부분에 있는지 모른다. 이 발단의 장면을 사유의 첫 장으로 삼아야 감독 주성치가 원하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지 모른다. 감독 주성치는 비범한 주체로 산다는 의미를, 그렇게 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비범한' 삶의 조건


그가 하려 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보자. 한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비범하다. 그 비범함을 인지하든 못하든, 그 비범함은 우리 안에 있다. 내재 된 비범함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이 그 비범함을 외부에서 찾으려 할 때, 그 찾은 것을 바탕으로 비범한 존재로 인정받으려 할 때 비범해 보이는 이미지와 상징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 비범함은, 다시 말하지만 비범해졌다는 착각, 허위적 비범함이다. 반면 자신의 비범함을 어떤 형태로든 자각하고 그것을 운명처럼 품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꾸려간다. 영화 속 은둔 고수들처럼 농사를 짓든, 국숫집을 하든, 양복집을 하든 말이다. 결론적으로 결국 비범한 삶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꾸려가는 삶이며, 자신을 책임지는 삶이다. 반면 자신을 책임지지 않는 삶, 자신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사람은 외부에서 비범함을 찾고, 자신의 실수와 삶의 문제와 무게를 외부에 떠넘기거나 회피한다.

그렇다. 결론적으로 감독 주성치가 <쿵푸 허슬>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한 사람의 비범함은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책임지는 삶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비범함을 찾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의 비범함을 타인과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그 비범함을 긍정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수련의 시간


숨겨진 마지막 메시지가 하나 더 있다. 내재적이고 태생적인 비범함도 수련에 의해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은둔 고수들의 무공은 수련에 의해서 얻은 것이었다. 많은 관객들이 잊어버리곤 하는데, 주인공 싱도 어린 시절 우연히 구입한 책으로 무술을 연마했다. 이들의 비범함은 태생적이고 내재적인 장점과 수련이 어우러져 성장했던 것이다. 자기부정의 세월 속에 주인공 싱의 비범함은 묻혀 있었다. 자기 긍정의 순간, 일인분의 양심과 책임을 실현하는 순간, 그의 비범함도 함께 꽃 피웠다. 마치 대나무의 퀀텀 리프처럼 말이다. 어쩌면 감독 주성치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타데오 이시도르 크루스>의 이 구절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아무리 길고 복잡한 운명이라 할지라도, 모든 삶은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게 되는 순간이다.”라는 구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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