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전성시대에 드는 의문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딸은 초등학교 입학 이후 몇 년 동안, 방과 후 교실에서 방송 댄스를 배웠다. 그 때문인지 여성 아이돌 팀의 댄스를 금세 카피하는 재주가 생겼다. 딸은 이것을 “딴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익힌 댄스를, 역시 그런 재주가 있는 다른 친구와 학교에서 맞춰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딸도 그 춤의 시작은, 다른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흥에 겨운 몸짓이었다. 딸은 마트나 백화점에서 음악이 나오면 나와 함께 가볍게 몸을 움직이곤 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힙합 아티스트처럼 팔을 살짝 들어 위 아래로 흔들었다. <여인의 향기>를 떠올리게 하는 탱고 음악이 나오면 어김없이 내미는 딸의 손을 잡고 몇 바퀴 돌려주곤 했고 라틴 음악이 나오면, 이런 음악이 나올 때마다 살사 춤 비슷한 몸짓과 현란한 스텝을 밟는 유재석처럼 우리도 그렇게 움직이곤 했다.

지금도 그럴 수 있을까? 안무를 모르는 노래가 나와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이 나와도 딸은 가볍게 몸을 흔들 수 있을까? 루이스 폰시의 <데스파시토>나 카밀라 카바요의 <하바나>에 맞춰 근본 없는 라틴 댄스를 출 수 있을까?

딸 같은 초등학생이 커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댄스 동아리 활동을 한다. 그러면서 의상도, 메이크업도, 춤도 오리지널에 가까워진다. 진품과 모사품의 경계를 허문 아이들은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 춤 영상을 찍어 SNS에 올린다. 아이들만 이러는 건 아니다. 짧은 영상을 올리는 숏폼 플랫폼에선 댄스 챌린지가 많다 보니 어른 중에도 춤을 잘 추고 싶다는 욕구가 높아졌다. 덕분에 일반인이 댄서나 아이돌처럼 춤을 잘 추고 싶어서 댄스 학원에 등록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됐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보다보면, 막춤 밖에 출줄 모르는 중년의 아빠는 묘한 걱정이 든다. 다들 완벽하게 춤추기 위해, 춤을 배우고 의상을 입는 시대에 오히려 춤이 가진 진짜 의미를 사라지는 건 아닌지 말이다. 그 걱정은 춤의 본질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안무와 막춤 사이에서


학교와 학원에서 배우는 잘 짜인 방송 댄스는 안무가에 의해 탄생한다. 안무는 특정 음악에 맞춰 정해진 춤을 추도록 고안 된 일련의 춤의 설계도다. 그래서 교향악단과 합창단의 리더는 지휘자이지만 무용단의 리더는 안무가다. 안무가의 설계가 있어야 무용가들이 춤을 출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안무가 없는 춤도 있다. 사물놀이이나 마당극 형태의 국악 공연의 피날레 부분에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며 예인(藝人)과 관중이 함께 어우러져 신명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설계가 없는, 무계획적, 무정형적 춤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생의 첫 춤은 이런 무계획적, 무정형적 막춤이었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가 틀어주는 음악에 맞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흥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 춤은 비정형적이기에 반복될 수 없다. 이 반복 될 수 없는 무정형성이 삶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는 춤의 본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더 나아가 신체의 속박에 대한 저항, 권위에 대한 저항, 억눌린 열정의 분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젊음,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의 폭발도 춤의 본질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필자의 생각을 대변하는 영화가 <풋루즈>다.

자유의 댄스(Footloose, 1984) 스틸컷.
자유의 댄스(Footloose, 1984) 스틸컷.

 

청춘과 춤의 공통점


춤을 다룬 영화는 많다. 검색하지 않아도 몇 개쯤 떠올릴 수 있다. 소련을 탈출하는 발레리노가 주인공인 <백야>가 먼저 떠오른다. 일전에 쓴 <빌리 엘리어트>도 발레를 다뤘다. 춤의 낭만을 담고 있는 영화라면 <더티 댄싱>이 빠질 수 없다. 춤이 가진 젊음의 에너지를 다룬 영화라면 <스텝 업> 시리즈가 맨 앞줄에 놓일 것이다. 춤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위안을 다룬 영화라면 당연히 <쉘 위 댄스>가 등장해야 한다. 영화의 서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요상한 몸짓만 가득해서 수많은 영화 팬들의 원성을 샀던 <람바다>다도 생각난다. 그러나 앞서 말한 춤이 가진 본질, 즉 앞서 말한 저항과 해방과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의 폭발 그 자체를 다룬 영화라면 난 이 영화를 맨 앞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이 영화 속 춤의 본질, 아니 어쩌면 우리가 앞서 논한 춤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 영화의 공간적,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우선 주인공인 십 대 소년 렌은 시카고에서 유타의 작은 마을로 이사 온다. 그곳에서 하이틴 영화의 클리세라고 할 수 있는 진부한 사건들을 다 겪는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이 동네는 춤이 금기시되어 있다는 것.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그야말로 청춘의 족쇄 그 자체인 마을이었다. 결국, 주인공과 친구들은 도시의 경계 넘어 있는 곳에 가서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청춘을 불사르고, 마을의 어른들은 그 청춘들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영화와 춤, 그리고 어쩌면 청춘의 본질까지 생각해보기 위해 우린 영화의 제목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원제 “Footloose”는 대화에서 “Footloose and fancy free"로 쓰이는데,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특히 연애나 결혼 관계의 종료 이후, 홀로 남게 된 사람이 종종 이런 표현을 쓴다고 한다. 이중 앞의 ”Footloose“는 발길 가는 데로, 마음 가는 데로 가는 나그네 인생 같은 발걸음,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 기원은 중세 시대의 항해술에서 출발한다고 하는데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배의 상태나 돛의 상태를 의미했다는 설이 있다.

2011년 작의 풋루즈 영화 스틸컷.
2011년 작의 풋루즈 영화 스틸컷.

자유의 댄스


이 단어의 뜻을 알고 나니 청춘의 정신을 춤으로, 춤의 정신을 청춘으로 보여주는 영화 제목으로 Footloose만큼 적절한 것이 없어 보인다. 개봉 다시 번역 된 제목인 <자유의 댄스>가 의역이 아닌 직역처럼 보일 정도다. 이 영화의 토대가 된 실화를 알게 되면 영어의 원제와 한글 제목 둘 다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영화의 배경이 된 이야기는 영화보다 약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오클라호마 주의 엘모어라는 도시엔 1898년 이후 춤이 금지되어있는 괴상한 법 조항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79년 졸업 댄스파티를 앞둔 졸업생들이 이 법안에 대해 항의했고 이를 시가 받아들여 이 법을 폐지했다. 이후 이 이야기를 접한 작가 딘 피치포드가 이 이야기를 소재로 써낸 작품이 바로 <Footloose>인 것이다.

Dean Pitchford. (사진=공식 홈페이지)
Dean Pitchford. (사진=공식 홈페이지)

자유의 댄스를 위해선 배움이 필요 없다.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에서 “임의에 음에 맞춰서 취하는 몸짓을 춤이라고 정의하면 우리는 쉴 새 없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같은 책에 인용한 아프리카 반투족에 대한 19세기 보고서에 따르면 반투족의 인사를 그 뜻 그대로 번역하면 모든 인사말이 ‘춤추고 있니?’, ‘춤추고 있어.’라고 한다. “그들은 일생을 관통하는 리듬이 곧 축제 때 추는 춤이니 굳이 일상을 춤과 구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축제 기간이면 캠퍼스 외각에 있던 대형 강의실 하나가 클럽으로 바뀌었다. 모든 창문은 암막 커튼으로 가려졌고 음악 동아리 회원들이 음악을 책임졌다. 음료수도 술도 부킹도 없었다. 조잡한 사이키 조명 아래 다들 춤을 췄다. 영화 마지막에 나온 춤판에서 펄쩍펄쩍 뛰던, 그러다가 다른 친구와 점프해서 배를 마주쳤던 그 청년처럼 그렇게 무정형의 춤을 췄다. 필자가 소위 나이트클럽이나 클럽 형태의 공간에서 춤을 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그렇게 신나게, 소진될 때까지 춤을 춘 적이 없고 지금도 당연히 그런 춤을 출 수 없다. 그래서인지 길에서 마주치는 청춘들은 그런 춤을 추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저 음악에 맞춰 흥겹게, 자기가 춤을 추고 싶은 데로 춤을 췄으면 한다. 완벽하게 흉내 내는 춤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춤도 아닌 그저 이 순간의 행복을 위한 춤을 췄으면 한다.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채 많은 꿈을 꾸는 동안만큼은 “자유의 댄스”를 더 많이 췄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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