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endies의 의미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 <그을린 사랑>의 원제는 <Incendies>다. 영어로는 <Scorched>. 직역하면 큰 불, 그을린, 동란(動亂), 전란(戰亂)이라는 뜻이 있다. 뜻의 추적을 여기서 멈추고 이 영화를 봐도 무방하다.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 단어의 뜻을 불교 용어까지 뒤적여 찾으면 이 영화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불교 용어로 이 단어는 업화(業火)라는 뜻이 있다.

업화란 중생이 과거에 지은 악업으로 받은 과보(果報)의 몸을 가책하는 지옥의 맹화(猛火)를 뜻한다. 여기서 과보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축약으로 그 뜻은 당연하게도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을 말한다. 그러니까 업화란 쉽게 말해 자기가 지은 업으로 인해 지옥에서 벌로 받는 불을 말한다. 그래서 이 업화의 뜻엔 범부의 악업의 힘이 맹렬함을 불에 비유할 때도 쓰인다. 평범한 사람이 지은 악한 업의 양과 그 업의 불러올 뒷날의 벌과 화의 맹렬함을 동시에 표현할 때도 쓰이는 것이다.

주체는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전에 영화 <향수>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향수>는 오늘을 사는 주체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의 현재적 구성 요건은 무엇이고, 존재의 위상과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했다.
완전한 사회적 주체, 개인으로 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하고, 향수로 메워져야 될 공백은 무엇인지 물었다. 이어서, 그렇게 채워진 나는 “나”인가, 아니면 사회적 존재인가 물었다.

반면 <그을린 사랑>은 과거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지, 더 나아가 오늘의 나를 변하게 할 수 있는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래도 되는지 묻는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의문도 같은 맥락이었다.

과거는 우리를 구성하는가,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업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가, 기억은 우리를 구성하고 현재의 삶을 결정짓는 요인인가, 잘 못 된 과거를 고칠 수 있다면 오늘의 우리도 달라질 수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드니 빌뇌브 감독 다른 작품, 예를 들어 <블레이드 러너>나 <시카리오>, <컨택트>도 넓게 보면 유사한 질문을 하고 있다.

과거와 주체의 관계에 대한 의문과 함께 들었던 다른 의문은 유산에 관한 것이었다. 영화 속 어머니의 유언은 과거의 기억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식들은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고, 그 기원의 명확한 토대 없이도 이민자의 나라 캐나다에서 잘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 유언을 받아 실행하여 기원과 마주하기로 한다. 그 결과, 사진이라는 흔적과 흩어진 기록을 지팡이 삼아 더듬대며 상처의 굴곡과 모퉁이를 돌고 돌아 기원의 고통스러운 윤곽을 확인하고 결국엔 그 기원에 가까이 다가가 마주하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 유언을 남긴 쌍둥이 남매의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합의 안 된, 강요 된 고통스러운 유언의 실행은 정당한가? 알 권리와 모를 권리는 같은 가치가 아니었던가?

영화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1)" 스틸컷.
영화 "그을린 사랑(Incendies, 2011)" 스틸컷.

 

한 장의 사진, 그 잔인함


영화 속, 한 장의 사진은 잔인하다. 그 잔인함은 그 한 장의 사진 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묻어 놨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몰라도 별 탈 없이 살았던 남매의 삶을 뒤흔들 어머니의 기억과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 담긴 노스탤지어와 사진 한 장이 증언하는 진실의 잔인함의 힘의 근원은 근본적으로 같다. 지나간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기억을 저장하고 찍는 순간은 담고 지나간 순간을 멈추게 한다. 그래서 사진은 때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조차 박제시켜 기억시킨다.

담겨진 순간은 기억을 강요한다. 남매가 들고 추적했던 교도소에서의 사진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진이 향수(鄕愁), 즉 노스탤지어에서 잔인함으로 전환될 때는 어느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가 잊고자 하는 기억을, 잊혔으면 하는 기억을 그 사진 한 장으로 추적할 때이다. 더 나아가 사진 한 장을 빌미 삼아 오늘의 삶을 뒤흔들려 할 때이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 담긴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어머니의 유서는 과거로부터 온 편지다. 영화는 이 편지와 사진 한 장으로 과거를 추적한다. 이 추적이, 이 영화가 말하는 건 뭘까? 역사를 살아낸 현 주체의 현재적, 주도적 자기완성의 불가능함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박하사탕>에서 만났던 그 은유와 닮았다. 안온한 일상을 사는 주체에게도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그 은유 말이다.

업화, 내 과거가 나에게 쏜 화살


업화는 결국 과거의 나로부터 오늘의 나에게 날아온 화살이다. 미투와 빚투, 학폭 사건, 정관계 인사들의 아빠 찬스, 땅 투기, 위장전입 같은 것들, 이 모두가 그렇게 과거로부터 날아온 화살이다. 이 화살의 범람을 보면서 우린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사진·그래픽=이톡뉴스)
(사진·그래픽=이톡뉴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자유로운가? 아마 아니라고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이 좁은 나라에서, 학연과 지연의 끈이 얽히고설킨 사회에서, 스마트 폰과 SNS를 누구나 사용하는 이 곳에서 과거는 오늘의 나에게 직접적으로 날아 올 것이다. 지금도 여리게,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엄습할 것이다. 과거는 그런 것이다.

영화 속 유서에 두 문장은 이 과거의 무게를 더 묵직하게 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묘비명을 새길 자격이 없다.”, “유년기의 기억은 목구멍에 박힌 칼 같아서 잊히지 않는다.” 과거는 이렇게 가혹한 것인가. 과거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은 편하게 죽을 권리도 없는 걸까? 묘비명을 새기기 위해 우린 죽기 전에 모든 약속을 완수하고, 완수하지 못한 약속들에 대해선 사죄 받아야 하는가? 도대체 묘비명을 새길 자격은 어떻게 획득 되는가?

과거, 오늘, 그리고 내일의 나


<그을린 사랑>처럼, 앞서 다른 칼럼에도 다뤘던 알렉스 프로야스의 영화 <다크 시티>도 기억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기억으로 형성 된 주체를 말하고, 과거의 기억, 새로운 기억이 오늘의 주체를 덮쳐 주체가 새로워질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가 모르고 살았던 과거의 기억을 알게 되면, 누군가 내게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면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는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기억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묻혀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주입되지 않아도 우리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기억의 창고를 자신도 모르게 운영하고 있다. 그 기억들은 <그것>, <지퍼스 크리퍼스>처럼 때가 되면 나타나거나 되살아난다.

그러나 우린 이런 공포 영화 속 주인공들이 원치 않는 기억의 망령과 투쟁했듯이 과거가, 과거의 기억이 오늘의 나를 흔들지 않도록 우린 투쟁할 권리가 있다. 더 나아가 미래의 나를 규정하지 못하도록 투쟁할 권리도 있다. 역설적이지만, 오늘의 주체는 이러한 과거의 나와의 투쟁 속에 성장한다.

“누구에게나 역사는 필요하고, 이를 통한 정체성의 고정 역시 필요하다.”는 백상현의 말은 이를 설명한다. 백상현은 이 설명 뒤에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라깡 학파의 정신분석이 규정하는 정체성은 언제나 도래하는 시간 속에 있으며 과거에 속하지 않는다.... 누구도 타자(부모)에 의해 새겨진 과거의 흔적을 숙명으로 짊어져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이 담긴 책은 <라깡의 루브르>다.

과거만 담긴 박물관, 그 박물관에 걸린 과거의 그림들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얘기하면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우리의 과거는 기억의 박물관이다. 그 박물관에 담겨 있는 기억이 오늘을 살아내는 교훈이자 미래의 자산이자 동력이 될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기억을 꺼내어 담담히 돌아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과거의 흔적을 숙명처럼, 유산처럼 짊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기억이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나를 막아서게 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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